프루시아스 1세
'불구자' 프루시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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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루시아스 1세의 테트라드라크마 (어린 시절) | |
비티니아의 국왕 | |
재위 | 기원전 228년–182년 |
전임 | 지아엘라스 |
후임 | 프루시아스 2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243 BC년경 |
출생지 | 비티니아 (오늘날 터키) |
사망일 | 기원전 182년 (61세 사망) |
사망지 | 비티니아 (오늘날 터키) |
부친 | 지아엘라스 |
모친 | 불명 |
배우자 | 아파마 |
자녀 | 프루시아스 2세 |
종교 | 그리스 다신교 |

프루시아스 1세 콜로스(고대 그리스어: Προυσίας ὁ Χωλός]; 기원전 243년경 – 기원전 182년)는 비티니아의 국왕으로, 기원전 228년경부터 기원전 182년까지 재위했다.
생애 및 재위
[편집]프루시아스는 활발하고 활동적인 지도자였으며. 그는 비잔티움과 전쟁을 벌여 (기원전 220년), 오랜 기간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미시아의 일부에 해당하는 아시아 영토를 차지하였다.[1] 이후, 프루시아스는 니코메데스 1세가 아리스바 지역으로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 초청한 갈라티아인들을 격퇴시키고, 이들의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처형하고 병사들에게는 이들의 짐을 약탈하도록 하였다.[2]
그의 재위 어느 시기에, 프루시아스는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으며, 데메트리오스의 딸 아파마를 아내로 맞이했다.
프루시아스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 및 흑해 지역의 헤라클레아 폰티카와 지속적인 전쟁으로 비티니아의 영토를 팽창시켰으며, 헤라클레아인들이 갖고 있던 여러 도시들을 차지하면서, 그 중 하나를 본인의 이름을 따 프루시아스라 명명했다.[3]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포위하는 동안,[4] 프루시아스는 포위 측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5]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가, 돌을 맞고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는데 헤라클레아 포위는 그의 부상으로 인해 해제되고 말았다.[6] 이 부상에서 그에게 '불구자'라는 별명이 생겼을 것이다.[7] 그는 필리포스 5세의 사위이기도 하였다.[8]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기원전 202년에 키오스와 미를레이아 등 항구를 수여하였다. 프루시아스는 이 도시들을 프루시아스 및 아파메이아로 이름을 다시 지었다.[9] 프루시아스 1세는 본인을 위해 해상에서 아탈로스 왕가를 상대로 기묘한 책략을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한니발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음에도[10] 안티오코스와 동맹을 거절하며 로마 공화정의 안티오코스 3세와 전쟁에서 중립으로 남아 있었다.[11] 그는 기원전 183년 키지코스에서 추정상 에우메네스 2세와 평화 조건에 조인했다.[12] 아파마는 프루시아스 1세 사이에서 그의 뒤를 물려받은 프루시아스 2세를 낳았다.
그가 재건한 프루사 (현재 터키의 부르사)는 프루시아스에서 명명된 것이다.
같이 보기
[편집]- 프루시아스 아드 히피움 - 터키 뒤즈제주의 고대 도시
참고 문헌
[편집]- Habicht, Christian, s.v. Prusias I., RE. Bd. ХХШ, 1. 1957
각주
[편집]- ↑ Polybius. 《Histories》.
He had also seized their Asiatic territory, a part of Mysia which had long been in their possession.
- ↑ Polybius. 《Histories》.
Prusias, therefore, led an army against them, and after destroying all the men in a pitched battle, put to death nearly all the women and children in their camp and allowed his soldiers who had taken part in the battle to plunder the baggage.
- ↑ Memnon. 《History of Heraclea Pontica》.
He changed the name of the city to Prusias, instead of Cierus.
- ↑ Memnon. 《History of Heraclea Pontica》.
After these cities, he subjected Heracleia itself to a severe siege
- ↑ Memnon. 《History of Heraclea Pontica》.
and killed many of those who were besieged.
- ↑ Memnon. 《History of Heraclea Pontica》.
but while climbing a ladder Prusias was hit by a stone which was thrown from the battlements. He broke his leg, and because of this injury the siege was lifted
- ↑ Memnon. 《History of Heraclea Pontica》.
where he lived on for a few years before he died, being named (because of his injury) "the lame".
- ↑ Polybius XV.22.1.
- ↑ Strabo. 《Geography》.
And Prusias restored them from their ruins and named the city Cius "Prusias" after himself and Myrleia "Apameia" after his wife.
- ↑ Justinus. 《Philippic Histories》.
- ↑ Polybius. 《Histories》.
- ↑ Polybius. 《Histories》.
This all happened in Cyzicus after the peace with King Prus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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