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 (조선)
노정(盧錠, 1615년~1691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이다. 본관은 풍천이다.
조선의 지방 군사제도가 영장제(營將制)로 바뀌면서 경상도에 설치된 6개 영(전 · 후 · 좌 · 우 · 중 · 별영) 가운데 대구에 설치되었던 중영의 초대 영장(1654-1656)을 지냈다(《대구부읍지》).
제주판관으로 있던 효종 4년(1653년)에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였으며, 제주목사(濟州牧使, 164대)로 부임해 있던 시기에 경신대기근을 겪었다.
생애
[편집]효종 2년(1651년)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부임하였다. 2년 뒤인 효종 4년(1653년)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헨드릭 하멜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남부에 표착하였다. 제주목사(155대) 이원진(李元鎭)은 대정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함께 판관 노정을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살피게 하고, 조사한 것을 육지부 조정에 치계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1]
효종 5년(1654년)부터 7년(1656년)까지 노정은 경상도 6개 영 가운데 하나로 대구에 설치되었던 중영(中營)의 영장(營將)을 지냈다.[주 1] 효종 8년(1657년) 1월에는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가 되어[3] 2월 2일에 사조하고 부임지로 향하였다.[4]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일본 사신들이 오더라도 종전처럼 서울까지 상경하는 것이 아니라 동래부(東萊府)에서만 머무르도록 막았으며, 기존의 재조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던 왜관(倭館)을 동래부와 가까운 초량 단 한 곳만을 남겨 두었고,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왜관 바깥으로 나오는 것과 조선인들이 왜관으로 들어가 일본인과 사사로이 교역하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는데, 현종 (顯宗) 6년(1665년) 동래부사 안진(安鎭)은 당시 왜관의 왜인들이 생선과 채소 장사를 빙자하여 멋대로 왜관을 벗어나 10리 바깥의 선암사(仙菴寺)까지 가서 그 절의 그림을 그려오는데도 왜관의 훈도나 왜어통사(일본어 통역관)은 물론 수문 군관과 부산진첨사(釜山鎭僉事)까지 이를 제재하거나 윗선에 서둘러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체포하여 가두고, 비국(비변사)에 이를 알렸다. 비변사에서는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을 행하였으며, 당시 부산진첨사로 있던 노정도 왜어통사와 함께 심문을 받았다(동래부사 안진 역시 중하게 추고되었다).[5]
현종 10년(1669년) 제주목사(169대)가 되었다.[6]
노정이 제주목사로 부임해 있던 시기와 겹쳐서 조선은 경신대기근이라는 소빙하기로 말미암은 기후변화로 인한 대참사를 겪었다. 노정은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제주 관내의 기근과 역병 등의 참화를 진정시키고 구휼하려 애쓴 점이 인정되어 현종 12년(1671년)에 전 판관 최진남(崔鎭南)이나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송로(李松老)과 마찬가지로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로 가자(加資)되었지만[7] 경신대기근의 참화(慘禍)는 제대로 제주도를 강타해서 현종 11년(1670년) 9월에 제주 3읍 합쳐 42,700여 명이던 제주도의 인구는 현종 13년(1672년) 10월에는 27,578명(남자 10,557명, 여자 17,021명)으로 반 이상이 줄었다.
현종 13년(1672년) 노정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55대)로 임명되었다.[8] 노정의 재임기에 조정은 우상 김수흥의 건의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늘렸다.[9]
숙종 4년(1678년)에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써 "경솔하게 적도(賊徒)를 석방하여 옥사(獄事)를 다스림이 엄중하지 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10]
숙종 6년(1680년) 병사(兵使)로써 황해감사(黃海監司) 김우석(金禹錫)을 따라 황주(黃州)·봉산(鳳山) 두 고을의 수령과 함께, 배를 타고 황해도 연안의 소곶이[小串]와 당포(唐浦) 항구로 들어가 그 형세를 살피기도 하였다.[11]
숙종 15년(1689년) 2월 14일에 비변사의 천거로 총융사(摠戎使)로 임명되었다.[12] 이후 훈련도정(訓鍊都正),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등의 관직도 수행하였는데, 이때 노정의 나이는 이미 여든의 고령이었다.[13]
노정이 사망하였을 때,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요직을 맡았음에도 죽을 때에는 집에 쌀 한 됫박도 없고 제대로 입을 옷도 없었다고 한다. 특진관(特進官) 강석빈(姜碩賓)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숙종은 그의 장례 물품을 국가에서 대어 주도록 하였다.[14]
관력
[편집]- 인조 27년(1649년) 3월경[주 2] ~ 효종 1년(1650년) 6월 8일 - 비변사 무낭청(만기)
- 효종 2년(1651년) ~ 효종 4년(1653년) - 제주판관
- 효종 4년(1653년) 12월 14일[16] - 진도군수(珍島郡守)
- 효종 5년(1654년) ~ 효종 7년(1656년) - 대구 중영장(초대)
- 효종 7년(1656년) 11월 14일[17] - 장단부사
- 효종 8년(1657년) 1월 17일 - 경상좌수사[3]
- 현종 1년(1660년) 6월 12일 - 전라우수사[18]
- 현종 4년(1664년) 10월 29일[19] ~ 현종 5년(1665년) 5월 17일[5] - 부산진첨사(釜山鎭僉事)
- 현종 10년(1669년) ~ 13년(1672년) 5월 - 제주목사(164대)[6]
- 현종 13년(1672년) - 12월 16일 - 삼도수군통제사(55대)[8]
- 숙종 4년(1678년) 8월 이전[10] - 포도대장(捕盜大將)
- 숙종 15년(1689년) 2월 14일[12] - 총융사(摠戎使)
- 숙종 15년(1689년) 4월 24일 이전[20] - 훈련도정(訓鍊都正)
- 숙종 15년(1689년) 7월 3일 이전[13] -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인물
[편집]노정은 제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의 처우 문제를 제주목사 이원진의 명에 따라 일선에서 처리하였다.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노정은 하멜이 제주도에 와서 (하급 관속들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대면한 조선측 관리였다. 《하멜 표류기》에는 막 제주도에 상륙하여 천막을 치고 혹시 있을 무력 충돌에 대비하며 긴장하고 있는 하멜 일행을 5월 18일 노정과 그 휘하 조선인 관리들이 불러서 다루는 모습이 "목 위에 조그만 방울을 단 큰 철쇄를 걸게 하니, 마치 네덜란드에서 빈양(牝羊) 목에 하는 것과 같았다. 이 모양으로 그들은 네 사람을 엎드러뜨려 지휘관 앞에 꿇려 앉혔다."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멜은 노정을 향해 자신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고자 한다는 뜻을 계속해서 피력했지만 노정은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 듣지 못했고(이는 하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더 이상의 심문은 어렵겠다고 생각한 노정은 하멜 및 그의 일행에게 '아락'(arac)이라는 술을 한 잔씩 권하고 하멜의 천막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는 제주도에 전해지는 토속주인 아래기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목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에는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제주 안에 창궐하던 기근과 역병에 대한 대처도 수행하였다.
현종 11년(1670년) 5월 25일 제주 동쪽 정의현 경내에 한인(漢人) 즉 중국인 심삼(沈三)·곽십(郭十)·채룡(蔡龍)·양인(楊仁) 등 65명이 표류해 왔다. 이들 가운데 머리를 깎은 자는 22명이었고, 입은 옷도 한족의 옷이나 만주족 옷, 일본 옷이 뒤섞여 있었다. 노정의 심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광동(廣東)·복건(福建)·절강(浙江) 등지 주민으로 청이 남경(南京)을 함락시킨 뒤 달아나서 청려국(靑黎國)에 인접한 향산도(香山島)로 건너가서 장사로 먹고 살았으며, 5월 1일 향산도에서 출항하여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도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되어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대답하였다. 노정은 향산도 즉 향옥(香澳)이란 지금 중국의 어느 성(省)에 속해 있는 곳인지, 또 청려국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고 누가 다스리고 있는지 등을 심문하고, 나가사키로 가고 싶다는 그들의 요청대로 배를 준비해서 내보내고 자신이 심문한 내용을 현종에게 몰래 치계하였다.[21] 노정의 치계 내용에서 이들이 대답한 대번국은 동녕국, 즉 명의 유민이자 부흥운동 지도자로 '국성야'(國姓爺)라 불렸던 정성공(鄭成功)의 아들 정금사(鄭錦舍)가 뒤를 이어 다스리고 있던 현재의 타이완 섬을 가리킨다. 청 왕조는 명의 유민들이 바다를 등에 업은 정성공과 연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강남 5개 성에 대해서 바닷가 가까운 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시키는 천계령을 시행하고 있었고, 천계령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지게 된 연해 주민들은 살기 위해서 타이완으로 건너가기도 하였다. 천계령이 해제되는 것은 청 왕조가 타이완을 완전히 정복하고 동녕국을 멸망시킨 강희 22년(1683년)에 이르러서였다.
후에 중국 선박이 제주에 표류하였을 때의 대처를 제주목사에게 지시하는 자리에서 오시수(吳始壽)가 현종 11년에 이들 중국인들이 표류해 왔을 때의 일을 꺼내며 "노정이 제주 목사가 되었을 때에 표류한 사람을 붙잡아 배를 발동시키고 군사를 조련하다가 큰일날 뻔하였고, 또 그 배에 물화(物貨)를 많이 실었었다"고 노정이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좋지 않은 일이 많았다고 그를 비난하였다.[22]
각주
[편집]내용주
[편집]출처주
[편집]- ↑ 《효종실록》11권, 효종 4년(1653년) 8월 6일 무진 두 번째 기사
- ↑ “[동네뉴스] 조선시대 노정 장군의 정체가 밝혀졌다”. 《영남일보》. 2023.3.29.
- ↑ 가 나 《효종실록》18권, 효종 8년(1657년) 1월 17일 경신 첫 번째 기사
- ↑ 《효종실록》18권, 효종 8년(1657년) 2월 2일 을해 첫 번째 기사
- ↑ 가 나 《현종실록》10권, 현종 6년(1665년) 5월 17일 임인 두 번째 기사
- ↑ 가 나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1669년) 7월 23일 갑인 첫 번째 기사
- ↑ 《현종실록》20권, 현종 12년(1671년) 12월 24일 신축 첫 번째 기사;《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1672년) 2월 24일 경자 첫 번째 기사
- ↑ 가 나 《현종실록》20권, 현종 13년(1672년) 12월 16일 정사 첫 번째 기사
- ↑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1674년) 1월 25일 경인 첫 번째 기사
- ↑ 가 나 《숙종실록》7권, 숙종 4년(1678년) 8월 14일 임오 두 번째 기사
- ↑ 《숙종실록》9권, 숙종 6년(1680년) 7월 2일 기축 첫 번째 기사
- ↑ 가 나 《숙종실록》20권, 숙종 15년 2월 14일 임자 두 번째 기사
- ↑ 가 나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7월 3일 정유 첫 번째 기사
- ↑ 《숙종실록》23권, 숙종 17년(1691년) 5월 21일 병오 첫 번째 기사
- ↑ 《승정원일기》 113책 (탈초본 6책) 효종 1년 6월 8일 경인 20/21 기사
- ↑ 《승정원일기》 129책 (탈초본 7책) 효종 4년 12월 14일 병자 2/18 기사
- ↑ 《승정원일기》 143책 (탈초본 7책) 효종 7년 11월 14일 무오 8/17 기사
- ↑ 《현종실록》3권, 현종 1년(1660년) 6월 12일 을미 첫 번째 기사
- ↑ 《현종개수실록》9권, 현종 4년(1664년) 10월 29일 계해 세 번째 기사
- ↑ 《숙종실록》20권, 숙종 15년 4월 24일 경인 세 번째 기사
-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1670년) 7월 11일 을축 네 번째 기사
- ↑ 《숙종실록》5권, 숙종 2년(1676년) 1월 24일 정미 첫 번째 기사
같이 보기
[편집]
전임 이인(李𡐔) |
제164대 제주목사 |
후임 윤계(尹堦) |
전임 이지원(李枝遠) |
제55대 삼도수군통제사 |
후임 신유(申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