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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레반트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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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레반트 정복
아랍-비잔티움 전쟁의 일부

2005년 팔미라의 로마 원형극장
날짜634년–638년
장소
결과 이슬람 세력의 승리
영토 변화 라시둔 칼리파국의 레반트 합병
교전국
라시둔 칼리파국 비잔티움 제국
가산족
타누크족
바누 주담
바누 라큼
지휘관

이슬람의 레반트 정복(아랍어: فَتْحُ الشَّام Fatḥ al-šām[*]; 직역:'시리아 정복'), 또는 아랍의 시리아 정복[1]은 서기 634년부터–638년까지 라시둔 칼리파국비잔티움의 시리아를 정복한 사건을 말한다.

방대한 아랍-비잔티움 전쟁의 일부로서, 레반트아랍계 무슬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고 빌라드 알샴이라는 행정구역으로서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레반트 남부 지역에서 벌어진 아랍과 비잔티움 간의 충돌은 서기 629년 무타 전투를 시작으로 무함마드 생애 내내 벌어졌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정복은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2년 뒤인 634년까지 이뤄지지 않았었다. 정복 활동은 무함마드의 뒤를 초대 칼리프들인 아부 바크르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진행했었다. 이 시기,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라시둔 군대의 핵심적인 지도자이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 붕괴 이래로 처음으로 539년에 이 지역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로마-그리스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를 거쳐 다시 한번 셈어파 구사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의 시리아 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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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무슬림들의 정복에 앞서 일곱 세기 동안 시리아는 로마의 통치 하에 놓여있었고 3세기, 6세기, 7세기 때 여러 번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았었다. 또한 라큼족 같은 사산조의 아랍 동맹 세력의 약탈 대상이기도 했었다.[2]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시작된 로마 시대 기간, 이스라엘 전역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은 '팔라이스티나'라는 이름이 명명됐고, 1 관구와 2관구로 구분되었다.[3] 로마인들은 또한 네게브, 시나이, 아라비아반도 서쪽 해안 등을 포함한 지역을 '팔라이스티나 살루타리스'로 명명했고, 때로는 '팔라이스티나 제3 관구' 및 '팔라이스티나 테르티아'라고 칭했다.[3] 일부는 동맹(symmachos)인 가산족의 통치를 받았다.[4]

로마-페르시아 전쟁마지막 전쟁 기간이던 603년을 시작으로, 호스로 2세 휘하 페르시아군은 10년 넘게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점령해내지만 이라클리오스의 여러 승전으로 628년에 강화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5] 이에 따라, 이슬람 정복이 시작되기 직전, 로마인들(오늘날 서양 역사학자들이 통상적으로 ‘비잔틴인’이라 부르는)은 해당 지역들에서 자신들의 통치를 회복하는 중이었고, 그중 일부 지역은 거의 20년 동안 통치 밖에서 이탈해 있었다.[5] 정치적으로, 시리아 지역은 안티오키아에서 사해 위쪽의 알레포까지 이어지는 시리아 본토 지방과 사해의 서쪽 및 남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등 두 지역으로 이뤄져 있었다.

시리아는 대부분 아람어그리스어 사용자들로 이뤄졌고 부분적으로 아랍인들이 있었는데, 주로 동부와 남부 지역에 있었다. 시리아의 아랍인들은 예멘에서 시리아로 강력한 가산족이 이주할 때까지 중요한 이들이 아니었으며, 가산족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후 로마의 봉신으로서 자신들만의 왕을 둔 준자치 국가를 이루었다. 가산 왕조는 로마 제국의 영예로운 봉신 가문 중 하나가 되었으며, 가산족의 왕은 보스트라에 있는 수도에서 요르단과 시리아 남부의 아랍인들을 다스렸다. 가산족의 마지막 국왕은 이슬람의 침입 당시 통치하던 자로, 자발라 이븐 알아이함이었다.

비잔틴 황제 이라클리오스사산 제국으로부터 시리아를 재탈환하고 나서, 사해 남쪽 가자로부터 새로운 방어선을 설치했다. 이 방어선은 도적들로부터 교역망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뿐, 비잔티움의 방어선 대부분은 전통적인 적수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마주하고 있는 북시리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시리아 방어선의 후방은 남쪽의 사막으로부터 진입하는 무슬림들에게는 북쪽 끝 가자에 이를 때까지 비잔틴의 정규군을 마주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었다.

7세기는 비잔티움 제국에 있어 긴급한 군사적 변화가 일어난 때였다. 최근 로마-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후 기진맥진하던 제국은 아라비아로부터 새로운 적수를 마주하던 때 분명 붕괴의 상태는 아니었으나, 이 새로운 도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는 분명히 실패했다.[6]

칼리파국의 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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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과 군사적 충돌은 무함마드 생전부터 시작됐었다. 629년 9월 카라크주 요르단강카라크의 동쪽에 위치한 무타에서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군대와 비잔티움 제국군대 및 이들의 동맹 아랍계 기독교인 가산족 봉신 병력이 무타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슬람 측 사료에서, 이 전투는 보통 가산족의 관료가 부스라로 향하던 무함마드의 사절단을 처형함으로써 가산족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복 시도로 묘사된다.[7] 교전 중에 무슬림 병력은 퇴각하였다.[8][9] 무슬림 지휘관 셋이 전사하자, 지휘권은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에게 넘어갔고 그는 잔류 병력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8] 살아남은 이슬람군은 메디나로 퇴각했다.

632년 힛자툴 와다 (고별 순례) 이후, 무함마드는 우사마 이븐 자이드를 비잔티움 제국의 발카 지방을 침공할 예정이던 원정군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 원정은 우사마 이븐 자이드의 원정으로 알려져 있고, 우사마의 아버지이자 무함마드의 양아들 자이드 이븐 하리타가 전사한 무타 전투에서 죽은 무슬림들의 복수를 하는 것이 표면상 목표였다.[10] 632년 5월/6월 우사마의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그의 군대는 비잔티움의 영토를 공격하여 약탈을 거둔 최초의 무슬림 군대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632년 6월에 죽고, 아부 바크르메디나에서 칼리프 및 정치 후계자로 지목된다. 아부 바크르의 계승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일부 아랍 부족들이 릿다 전쟁 (아랍어로 변절의 전쟁)중 그에게 반기를 일으켰다. 릿다 전쟁은 히즈라력 11년 때 벌어져 종료되었다. 히즈라력 12년이 도래하는, 633년 3월 18일, 아랍은 메디나의 칼리프 권위 아래 통일이 이뤄졌다.

아부 바크르가 전면적인 제국 정복을 의도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그러나 그는 역사적 흐름을 촉발시켰고, 그로부터 불과 몇십 년 만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 가운데 하나가 탄생하게 됐으며,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 장군이 이끈 페르시아 제국과의 대결이었다.

시리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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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둔 칼리파국의 레반트 침공을 나타내는 지도.

사산조를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거두며 연이어 이라크 정복을 해낸, 할리드는 이라크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사산 군대와 교전하는 동시에, 그는 또한 비잔틴의 가신이던 아랍계 가산족과도 부딪혔다. 곧 메디나에서는 아라비아반도 전역에서 부족 파견 부대를 모집했다. 릿다 전쟁 중 반기를 일으킨 부족들은 소집에서 배제되어 636년까지 라시둔 군대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우마르 칼리프가 야르무크 전투까디시야 전투 때 인적 자원이 부족하자 소집하였다. 부족 파견대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전통은 우마르가 상비군을 조직하는 636년 때까지 이어졌다. 아부 바크르는 병력을 네 개 부대로 조직하였고 각 부대의 지휘관과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아부 바크르를 상호 지원을 위해 연락을 이어나가라고 병력들에 명령했고 아부 우바이다를 총사령관으로, 야지드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11][12] 또한 그는 또한 야지드를 군사 구역 가운데 한 곳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윤리적·작전적 지침을 세세하게 부여하였다:

적들과 마주한다면, 신께서 자네들을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니, 사슬로 묶지도 말고, 신체를 훼손하거나 절단하지도 말며, 배신하지도 말라, 그리고 (패배자들을) 겁쟁이라 비난하지도 마라. 아이들과 노인 여성을 죽이면 안 되고, 야자수를 태우거나 뽑아서도 안 되며, 과실 나무를 베어내지도 말며, 먹을 목적이 아니라면 가축을 잡지도 말아라. 은둔처에 머물며 자신을 신[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은둔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위해 은둔한 일에 대하여는 그들을 내버려 두라. 또한 자네들은 머리 한가운데에 마치 사탄이 자리 잡은 듯한 자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의 정수리는 마치 사막꿩의 둥지(afahīs al-qatā)와도 같이 되어 있다. 그들이 회개하여 이슬람에 귀의할 때까지 혹은 손수 조공을 바치며 겸손히 복종할 때까지 검으로 그들이 머리에 파놓은 둥지 같은 것들을 쳐라. 신은 반드시, 비록 그들이 눈앞에 없을지라도(bi-al-ghayb), 그분과 그분의 사도들을 돕는 자들을 도우실 것이다. 나는 자네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신의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13][14]

이 명령의 사실성에 대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James Moreton Wackeley는 이를 초기 이슬림 지도력을 이상화 하려는 의도가 담긴 문학적 장치로 묘사한 반면,[15] 알브레히트 노트는 이 문구를 널리 퍼진 전승의 일부에 대해서 후대의 전승자들이 사실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요한 초기 인물들이 한 것이라 회상하며, 도덕적 그리고 합법적 규범을 고취하기 위해 기존의 재료를 사용한 것이라 해석하였다.[16] 이러한 해석들은 이슬람 전승에 대해 역사적 비판 방식을 적용하고 있는, 폭넓은 세속적 학술 담론에서 제시된다.[17][18][19][20]

시리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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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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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부크 너머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이동하던 야지드의 부대는 소규모 아랍계 기독교인 병력과 접촉하게 되며, 이슬람 선봉대와 척후전을 벌인 뒤 그들은 퇴각하게 되고, 이후 야지드는 사해의 남쪽 끝과 접하는 아라바에 도착한다.

비잔티움의 주 방어선이 가자 인근 해안 지역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야지드는 아라바 계곡으로 갔고 같은 시기 아므르 빈 알아스가 에일라트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려는 야지드와 아므르의 부대를 막으려 비잔티움 측에서 파견된 두 선봉대는 이들에게 쉽게 패퇴당했으나 라시둔 병력이 정해진 목표에 도착하는 것을 막아내기는 했다. 다른 한편 아부 우바이다와 슈라빌 등은 진격을 이어나갔고, 634년 5월 초쯤 이들은 부스라자비야 사이 지역에 도달했다.[12] 비잔티움 황제 이라클리오스는 아랍 제후들로부터 무슬림 병력의 움직임 소식을 듣고, 반격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라클리오스의 명에 따라, 북쪽에 있던 수비대의 비잔티움 병력은 아즈나다인(Ajnadayn)에서 집결하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비잔티움군은 아므르의 부대과 교전하고 요르단과 시리아 남부에 있던 나머지 이슬람 병력의 측면 또는 후방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대략적 추정에 따르면, 비잔티움 군대의 병력은 약 100,000명이었다고 한다.[21] 아부 우바이다는 634년 5월 셋째 주에 비잔틴인들의 대비 소식을 칼리프에게 알렸다. 아부 우바이다는 이런 대규모 작전의 군 지휘 경험이 없었고 특히 강력한 로마 병력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 인 왈리드가 지휘권을 맡도록 결정하였다. 초기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에 의하면, 아부 바크르는 "알라에 따라, 나는 할리드 인 알 왈리드로 하여금 로마인들과 사탄의 친우들을 멸하려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2]

할리드 이븐 왈리드의 시리아 공격로를 나타내는 지도.

할리드는 즉시 6월 초 이라크알히라에서 본인 병력의 절반인 약 8,000명과 함께 시리아로 출발하였다.[12]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가는 경로가 두 개가 있었으며 하나는 두마트알잔달을 거쳐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락까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시리아의 이슬람군은 즉시 지원 병력이 필요했고, 이에 할리드는 도착까지 몇 주가 걸리는 장거리 경로인 두마트알잔달를 통해 시리아로 향하는 전통적 경로를 피했다. 메소포타미아 경로는 그 방향 및 시리아 북부에 로마의 수비대가 있어 그곳도 피했다. 무슬림 군대가 시리아에서 측면을 돌파당하고 있던 그 시점에 그들과 교전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할리드는 시리아 사막을 통과하는 비전통적 경로로 시리아로 향하는 짧은 길을 택하였다. 그의 병력은 사전에 지정된 오아시스의 수원에 도착하기까지, 단 한 방울의 물도 없이 이틀을 진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할리드는 시리아 북부에 도착하였고 오른쪽 측면에서 비잔티움군을 추격했다. 현대 역사가들에 따라면, 이 기민한 전략적 기동은 시리아의 비잔틴 방어선을 흔들어 놓았다고 한다.[23]

시리아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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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타메르, 쿠라키르(Quraqir), 수와(Suwa), 아라크, 그리고 옛 도시 타드무르 등은 초창기 할리드에게 함락됐다. 알수크나, 알카르야타인, 화와린 등은 알카르야타인 전투와 화와린 전투 이후 점령됐다. 이 도시들을 처리한 뒤, 할리드는 현재 사니타알우캅(우캅 고개)로, 할리드의 군대 군기에서 이름 붙여진 산길을 통해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다마스쿠스에서 가산족의 수도인 부스라로 이동했다. 그는 나머지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부스라의 시리아-아리방 경계 인근으로 병력을 집중시키라 명령했다. 마라즈알라합(Maraj-al-Rahab) 지역에서 벌어진 마르즈라히트 전투에서 할리드는 속전속결로 가산족 군대를 제압시켰다. 한편, 시리아의 이슬람 총사령관인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자라는 슈라빌 이븐 하사나에게 부스라를 공격하라 했다. 슈라빌은 4,000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으로 부스라를 포위했다. 로마 및 가산 수비대는 이 병력이 다가올 거대한 이슬람 군대의 선봉대라는 것을 깨닫고 요새화 된 도시에서 나와 슈라빌을 둘러싸 공격했다. 하지만 할리드가 기병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였고 슈라빌을 구원했다. 할리드, 슈라빌, 아부 우바이다 연합군은 부스라에 대한 포위를 재개했고, 부스라에서 634년 7월 중엽에 항복하며 사실상 가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할리드 이븐 왈리드의 시리아 침공 경로를 나타내는 지리 지도

참조

[편집]

각주

[편집]
  1. Sharon, M. (2007). 〈The decisive battles in the Arab Conquest of Syria〉. 《Studia Orientalia Electronica》 101. 297–358쪽. 
  2. "Syria."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 October 2006 Syria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보관됨 14 5월 2006 - 웨이백 머신
  3. Kaegi, 1995, p. 41.
  4. "Ghassan."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18 October 2006 Ghassan (ancient kingdom, Arabia)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5. "Iran." Encyclopædia Britannica. 2006.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20 October 2006 Iran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6. Nicolle, David (1994). Yarmuk CE 636: The Muslim Conquest of Syria. Osprey Publishing.
  7. El Hareir & M'Baye 2011, 142쪽.
  8. Buhl 1993, 756–757쪽.
  9. Kaegi 1992, 67쪽.
  10. Razwy, Sayed Ali Asgher. 《A Restatement of the History of Islam & Muslims》. 283쪽. 
  11. Scheiner, Jens; Hassanein, Hamada (2019). 《The Early Muslim Conquest of Syria: An English Translation of al-Azdī’s Futūḥ al-Shām》. Routledge. 71쪽. ISBN 978-1000690583. 
  12. The Sword of Allah: Khalid bin al-Waleed, His Life and Campaigns: page no:576 by Lieutenant-General Agha Ibrahim Akram, Nat. Publishing. House, Rawalpindi (1970) ISBN 978-0-7101-0104-4.
  13. Scheiner, Jens; Hassanein, Hamada (2019). 《The Early Muslim Conquest of Syria: An English Translation of al-Azdī’s Futūḥ al-Shām》. Routledge. 75–76쪽. ISBN 978-1000690583. 
  14. Wakeley, James Moreton (2017). 《The Futuḥ al Sham of al Azdi al Basri Syrian narrative history》. Oxford–Mainz–Vienna–Princeton Graduate Exchange. University of Oxford. 7쪽. 
  15. Wakeley, James Moreton (2017). 《The Futuḥ al Sham of al Azdi al Basri Syrian narrative history》. Oxford–Mainz–Vienna–Princeton Graduate Exchange. University of Oxford. 6–7쪽. 
  16. Conrad, Lawrence I.; Noth, Albrecht (1994). 《The early Arabic historical tradition: a source critical study (Translated by Michael Bonner, 2nd edition)》. Princeton: The Darwin Press inc. 87–90쪽. ISBN 0-87850-082-0. 
  17. Peters, Francis E. (August 1991). “The Quest for the Historical Muhammad”.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ies》 23 (3): 291–315. 
  18. Firestone, Reuven (2008). 《An Introduction to Islam for Jews》. Philadelphia: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28쪽. ISBN 978-0-8276-0864-1. 
  19. Weiss, Bernard G. (2006). 《Spirit of Islamic law》. Athens, Georgia: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3쪽. ISBN 0-8203-2827-8. 
  20. Brown, Daniel (2020), 《The Wiley Blackwell Concise Companion to the Hadith》, The Wiley Blackwell companions, Hoboken, NJ: John Wiley & Sons, 39–52쪽, ISBN 9781118638514 
  21. Tabari: Vol. 2, p. 601
  22. Akram, Agha Ibrahim (2016년 2월 13일). 《Islamic Historical General Khalid Bin Waleed》 (영어). Lulu Press, Inc. ISBN 978-1-312-23371-3. 
  23. Tabari: Vol. 2, p. 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