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헨 자유시
| 자유제국도시 아헨 (엑스라샤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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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eie Reichsstadt Aachen (독일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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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제국도시 아헨 | ||||
| 수도 | 아헨 | |||
| 정치 | ||||
| 정치체제 | 자치공화국 | |||
| 역사 | ||||
| 시대 구분 | 중세 | |||
| • 도시 대화재 | 1656년 | |||
| • 1차 조약으로 상속 전쟁 종결 | 1668년 5월 2일 | |||
| • 2차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 | 1748년 4월~5월 | |||
| • 프랑스에 병합 | 1797년 | |||
| •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 | 1815년 | |||
자유제국도시 아헨(독일어: Freie Reichsstadt Aachen, 프랑스어: Ville libre d'Aix-la-Chapelle)은 오늘날 독일 아헨을 중심으로 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제국도시이자 온천도시였다. 쾰른 서쪽과 저지대 국가 남동쪽에 있었으며, 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 관구에 속했다.[1] 신성 로마 황제의 대관식이 치러지는 도시인 것과 더불어 순례길의 도시, 산업의 발전, 역대 황제들이 부여한 특권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번영하는 시장도시로 꼽혔다.[2]
역사
[편집]1166년 아헨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제국 직할령을 부여받고 카롤루스 대제 특권(Karlsprivileg)의 형태로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제국도시로 선포되었다. 1351년부터 1387년까지 뫼즈강과 라인강 일대 동맹에 참여하여 평화를 유지하였다.[2] 1450년에는 반란을 계기로 지방정부에 길드가 참여하게 되었다.[2]
16세기부터 아헨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도시로서 지역경제도 침체되어 갔다.[2]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기에는 프랑스 왕국과의 국경과 너무 인접해 침공의 위협이 있었고, 제국의 중심에서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2] 결국 1562년 제국 선거와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대관식이 처음으로 아헨이 아닌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으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해서 프랑크푸르트에서 치르는 관례가 생겼다.[2]
동시기 퍼진 종교 개혁도 아헨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요인이었는데 1580년 개신교가 우세를 점하자 1598년 쾰른 대주교 선제후 에르네스트 폰 바이에른이 제국 추방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2] 아헨시의 종교 갈등은 1613년 마티아스 황제가 새로운 제국 추방령을 내리는 결과를 낳았으며,[2] 1614년 암브로지오 스피놀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아헨시의 개신교 세력을 진압하고 가톨릭교 세력권으로 되돌려 놓았다.[2] 1618년 30년 전쟁에 이어 1656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4,000채의 가옥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2]
1667년 상속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짓는 평화회의가 아헨에서 열렸다. 1668년 5월 2일 엑스라샤펠 조약의 체결로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웨덴 왕국의 삼국 동맹이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남네덜란드에 대한 상속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맺었다. 이와 더불어 루이 14세는 정복했던 부르군트 자유백국을 반환하고, 플란데런의 12개 방어시설을 넘겨받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1748년 10월 18일 제2차 엑스라샤펠 조약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의 조항에 따라, 아헨은 프랑스 제1공화국에 편입되어 로에르주 (Roer)의 대도시가 되었으나, 1815년 빈 회의 결과에 따라 프로이센 왕국에 편입되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Aachen. 2012.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Retrieved 19 June 2012, from http://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200/Aachen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Chisholm, Hugh 편집 (1911). 〈Aix-la-Chapelle〉 11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44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