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콘타리니


프란체스코 콘타리니 (Francesco Contarini, 1556년 11월 28일 베네치아 – 1624년 12월 6일 베네치아)는 제95대 베네치아의 도제이며, 1623년 9월 8일부터 14달 뒤인 사망 시점까지 재위했다. 베네치아 건국에 이바지한 가문 중 하나인 콘타리니 가문 출신이다.
배경, 1556년–1623년
[편집]프란체스코 콘타리니는 베르투치 콘타리니와 라우라 돌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모두 그가 어렸을 때 사망하면서, 그는 고아가 되었고, 두 형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삼형제는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프란체스코 콘타리니의 교육에 쓰이지는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던 콘타리니는 여러 유럽 궁정에 베네치아 공화국을 대표하여 몇 차례 외교 공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602년부터 1604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바일로로 있었다.[1] 1611년, 콘타리니는 잉글랜드에 머물며, 마르크 안토니오 코레르와 함께 제임스 국왕의 궁정에서 베네치아 대사로 활동했다. 세련된 예절을 갖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먼저 둔다고 하는 평판을 얻었다.
도제, 1623년–1624년
[편집]1623년 8월 12일 안토니오 프리울리가 사망한 뒤, 명확한 도제 후임자가 없었다. 투표가 시작되어서도 고착 상태에 이르렀다. 프란체스코 콘타리니는 특별히 도제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79번의 투표에서 도제를 선출해내지 못하자, 그는 도제가 되어달라는 설득을 받아, 9월 8일 도제로 선출되었다.
콘타리니 재위 시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관습대로, 그는 대규모 베네치아 행사에 참석했다. 1623년 2월 발텔리나로 번져나갔던 30년 전쟁의 여파는 잘 해결되었으나, 콘타리니가 직접 친정하지는 않았다.
콘타리니는 도제로 선출되던 당시 67세로, 80세 이상이 잦았던 자리 치고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도제가 된 지 12달 만에 병에 걸려 6주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각주
[편집]이 문서는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됨.
- ↑ Dursteler, Eric (2001). “The bailo in Constantinople: Crisis and Career in Venice's Early Modern Diplomatic corps”. 《Mediterranean Historical Review》 16 (2): 1–30. doi:10.1080/714004583. ISSN 0951-8967. S2CID 159980567.
| 공직 | ||
|---|---|---|
| 이전 안토니오 프리울리 |
베네치아 도제 1623–1624 |
이후 조반니 1세 코르나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