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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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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 순(邯鄲淳, 132년경 ~ 221년경)은 중국 후한 말 ~ 조위유학자이자 관료로, 자례(子禮)[1]이며, 예주 영천군 사람이다. (竺)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었다. 후한의 관료 도상의 사위다.[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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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단 순(邯鄲淳)
시대 후한 ~
생몰 양가 원년(132) ~ ?
자례(子禮)[1]
본관 · 출신 예주 영천군
관직 박사(博士) · 급사중(給事中)〔문제〕
작위
소속 유표유종조조문제

원가(元嘉) 원년(151년), 상우령(上虞令) 탁상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를 세우려 했는데, 탁상은 제자 한단순에게 비문을 적도록 하였다. 한단순은 바로 붓을 들어 비문을 써내려갔고, 비문의 내용은 더없이 훌륭하였다. 한단순은 이때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초평(初平) 연간에 전란을 피하여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섬겼으며, 유표가 죽은 후에는 유종(劉琮)을 섬기다가 조조(曹操)에게 항복했다.

조조는 그의 학식과 재능을 높이 샀을 뿐만 아니라, 아들 조식(曹植)이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한단순을 조식의 밑에 두었다. 조조는 매일 한단순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늘 그의 박식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조식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문제(文帝) 또한 그를 중용하여, 위(魏) 건국 후에는 한단순을 박사(博士) · 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였다.

한단순은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비롯하여 여러 옛 서체에 관한 지식이 풍부했으며, 전서(篆書)는 당대 최고였을 뿐만 아니라 예서(隷書)는 양곡(梁鵠)에 버금가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저서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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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림(笑林)》
  • 《예경(藝經)》
  • 〈투호부(投壺賦)〉: 《예문유취》 권74, 〈교예부(巧藝部)·투호〉에 그 전문이 전한다.
  • 〈상수명술표(上受命述表)〉, 〈수명술(受命述)〉 위의 책 권10, 〈부명부(符命部)·부명(符命)〉에 각각의 그 전문이 전한다.
  • 〈답증시(答贈詩)〉: 위의 책 권31, 〈인부(人部)〉15, 증답에 그 전문이 전한다.
  • 〈후한홍려진군비(後漢鴻臚陳君碑)〉: 《고문원》 권19에 그 전문이 전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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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는 한단순이 비문을 적은 《조아비》(曹娥碑)의 기록이며, 《삼국지》 권21, 〈위서〉 21, 왕찬전(王粲傳) 주석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자숙(子叔), 《예문유취》 권71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淑), 《태평어람》 권753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원숙(元淑)이라고 전한다.
  2. 역도원, 《수경주》 권40, 점강수(漸江水), "縣令度尚,使外甥邯鄲子禮為碑文" 참고로 외생(外甥)은 사위가 장인·장모에 상대하여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