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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스미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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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스미토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에도 시대인 안세이(安政) 2년(1855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쓰쿠토(築土) 진쟈 소장.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에도 시대안세이(安政) 2년(1855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쓰쿠토(築土) 진쟈 소장.
신상정보
출생 간표(寬平) 5년(893년)?
사망 덴교(天慶) 4년 6월 20일(양력 941년 7월 21일)
별명 난카이의 용(南海の龍)
관위 종5위하, 이요노죠(伊予掾)
씨족 후지와라 북가 나가라류
부모 아버지: 후지와라노 요시노리
친아버지?: 다카하시노 도모히사(高橋友久)
형제자매 스미하루(純春), 스미요시(純美), 스미토모, 스미노리(純乗), 스미마사(純正), 純素, 스미유키(純行), 스미나리(純業)
자녀 쥬타마루(重太丸), 아리노부(有信), 노리토시(紀年), 이오마루(伊王丸), 사네즈미(真純)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 (ふじわら の すみとも))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의 귀족, 무사이자 해적이다.

고다이벤(右大弁) 후지와라노 도쓰네(藤原遠經)의 손자이자 다자이쇼니(大宰少貳)를 지냈던 후지와라노 요시노리(藤原良範)의 셋째 아들.[2] 동생으로 후지와라노 스미노리(藤原純乘)가 있다. 관위는 종5위하[2][주석 1] 이요노죠(伊予掾).[2]

덴교 3년(940년) 2월 6일, 세토우치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간토(關東) 지방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가 일으킨 난과 함께 조헤이 · 덴교의 난으로 불린다.

생애

[편집]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国芳)가 그린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고마타테이시(藤原純友駒立岩).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자신의 말을 매어 두었다는 전승이 있는 바위이다. 일본 에히메 현(愛媛県) 마쓰야마 시(松山市)의 구키 신사(久枝神社) 경내 소재.

출생지나 고향은 현재 시점에서 불명이지만, 이요 국(伊予国, 에히메 현)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일본의 명문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 씨(藤原氏) 안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로써 번영을 누렸던 후지와라 홋케(藤原北家) 출신으로써, 대숙부(大叔父)로 셋쇼(攝政) 후지와라노 모토쓰네(藤原基經)가 있지만, 일찍 아버지를 잃어 교토에서의 출세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방관으로서 당초에는 당숙인 이요노카미 후지와라노 모토나(藤原元名)를 따라 종7위하 이요노죠로서 당시 세토우치에 발호하던 해적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귀임한 뒤 해적 추포를 명하는 선지가 내려지자, 조헤이(承平) 6년(936년) 3월경에는 다시 이요로 내려왔다.[3] 《일본기략》(日本紀略) 조헤이 6년 6월 모일조에 따르면 이 무렵에 스미토모가 해적의 두령이 되어,[주석 2] 이요(에히메현)의 히부리 섬을 근거지로 삼아 1천 척 이상의 배를 거느리고 주변 해역을 휩쓸며, 이윽고 세토나이카이 전역에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조헤이 6년 시점에서 스미토모는 해적을 추포하는 입장이었지 추포당할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이 근년의 일본 학계의 연구 동향이다.

간토에서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난을 일으켰을 무렵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세토우치의 해적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세력은 '큰 바다로 나아가고자' 이요를 넘어 기나이에까지 진출했고, 덴교 2년(939년) 12월에는 부하 후지와라노 후미모토(藤原文元)로 하여금 비젠노스케(備前介) 후지와라노 다네타카(藤原子高)·하리마노스케(播磨介) 시마다 고레모토(島田惟幹)를 셋쓰(攝津)의 스기역(須岐驛)에서 습격하게 하여 사로잡았다. 이때 다네타카는 귀와 코가 잘리고 아내를 빼앗겼으며 그의 아이들은 모두 살해당했다. 그 당시 도고쿠에서도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모반을 일으켜 '신황'을 칭했다는 보고가 교토에 전해졌으므로 당시 일본 조정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동·서에서 함께 작당해 모반을 일으킨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까지 나올 판이었다.

교토 조정은 스미토모 추토를 위해 1월 16일에 산요도추포사(山陽道追捕使)의 장관으로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 차관에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經基), 주전(主典) 후지와라노 요시유키(藤原慶幸), 오쿠라노 하루자네(大蔵春実) 등을 임명하여 병사를 모으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노노 요시후루에게는 일단 진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고, 아울러 30일에는 스미토모의 회유를 꾀하려 그에게 종5위하를 내렸다(그때 병력의 대부분은 도고쿠, 다이라노 마사카도를 진압하는 데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스미토모는 일단 조정의 위계 하사를 받기는 했지만, 해적 행위는 그만두지 않았고 이듬해 덴교 3년(940년) 2월에는 아와지(淡路)의 병기고를 습격해 그곳에 있던 무기를 빼앗았다.

그 무렵 수도에서는 각지에서 방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오노노 요시후루는 "스미토모가 배를 타고 지금 올라오고(교토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조정에서는 스미토모가 수도를 습격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여 궁정의 14문마다 군사를 배치하고 2월 22일에는 수도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山城)의 입구인 야마자키에 경비를 강화하지만, 나흘 뒤인 26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야마자키가 전소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과 스미토모와의 관계에 대해 스미토모군의 간부로 전임 야마시로노죠(山城掾)였던 후지와라노 미쓰토시(藤原三辰)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나 앞서 후지와라노 다네타카 습격 사건 등으로 미루어, 스미토모의 세력은 단순히 세토나이카이에만 그치지 않고 헤이안쿄 주변에서 셋쓰에 걸쳐 분포하던, 조정 및 관아로부터 '도적'이라 불리던 무장한 불만분자들에게까지 침투해 있어 수도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는 점에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지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야마자키가 전소되기 전날인 2월 25일,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후지와라노 히데사토(藤原秀鄕)·다이라노 사다모리(平貞盛) 등에게 토멸되었다는 보고가 수도에 도착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가 진압되어 병력을 서쪽으로 집중시킬 수 있게 된 교토 조정은 더욱 적극적으로 스미토모 토벌에 나섰다. 5월에 마사카도 진압을 위해 파견된 동정군이 귀경한 뒤, 6월에 후지와라노 후미모토를 후지와라노 다네타카 습격범으로 단정하고 그에 대한 추토령이 산요도사 오노노 요시후루에게 내려졌다. 이는 마사카도 토벌의 성공으로 스미토모 진압에 대한 자신감이 고취된 조정이 스미토모를 도발하여 순순히 후미모토를 인도하고 조정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역적으로서 토벌될지를 놓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8월 22일에는 오미 국에 칙부를 내려 아와 국을 칠 병사 1백 명을 징발하였다.

이 첩보에 동요했는지 스미토모는 그 직후 히부리시마에서 약탈했던 배를 돌려 주었다. 그리고 6월에는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에서 올리는 보고서와 고려로부터의 첩장이 무사히 도착했고, 7월에는 사다이진 후지와라노 나카히라(藤原仲平)가 중국 오월(吳越)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 잠잠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나 8월에 스미토모는 다시 4백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이요와 사누키(讚岐)의 관청을 습격해 불사르고 비젠(備前)·빈고(備後)의 병선 100여 척도 태워버린 뒤[주석 3] 나가토(長門)를 습격해 관물을 약탈했다. 시모무카이 다쓰히코는 산요도추포사 요시후루가 비젠과 빈고의 병선 1백여 척을 동원하여 사누키로 건너갔고 사누키의 반란 세력을 구원하기 위해 스미토모가 4백여 척을 거느리고 사누키로 들어가 조정군과 싸웠으며 비젠, 빈고의 병선을 불태우고 사누키를 점령한 것이라고 추정하였는데,[4] 덴교 3년(940년) 정월에 사이고쿠 병선이 많이 와서 빗추군이 도망쳐 흩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던 점을 들어 비젠, 빈고의 병선이 불탄 것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세력의 선단에 대한 습격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다.[5]

9월 2일에 사누키에서 기노 후미노리(紀文度)가 조정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10월에는 마침내 규슈의 최대 지휘부였던 다자이후까지 습격해 추토사 아리와라노 스케야스(在原相安)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약탈을 감행했다. 11월에는 스오(周防)의 주전사(鑄錢司)를 습격해 불태웠으며(전투 중에 화살에 맞아 죽은 양측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12월은 도사(土佐)의 하타군(幡多郡)을 습격한다. 교토 조정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선단이 비젠과 빈고를 약탈했던 그 달에 오노노 요시후루를 산요도, 난카이도의 추포흉적사로 정하고, 여러 구니들로부터 병사들을 징집하기에 이르렀다. 《스미토모 추토기》에 따르면 스미토모와 사누키에서 전투가 있은 뒤 오노노 요시후루 등의 추포사를 하리마와 사누키 2개 구니에 보내어 2백여 척의 배를 만들게 하여 적지 이요국으로 출항시켰다고 한다.

덴교 4년(941년) 정월, '해적 가운데 포악한 자'로 사누키의 반란을 주도한 후지와라노 미쓰토시의 목이 이요에서 진상되었다. 2월, 스미토모군의 간부인 후지와라노 쓰네토시(藤原恒利)가 조정군에 항복했고, 조정군은 그에게서 받은 정보를 근거로 효고노조 미야지노 다다모치(宮道忠用)를 보내 쓰네토시와 함께 스미토모의 본거지 히부리 섬을 쳐서 깨뜨렸다. 스미토모는 서쪽으로 도망쳐서 다자이후를 쳐서 점령하지만, 스미토모의 아우인 후지와라노 스미노리가 야나기가와(柳川)에 침공했다가 가바이케(蒲池)에서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守) 다치바나노 기미요리(橘公賴)에게 패한다. 5월에는 오노노 요시후루가 이끄는 조정군이 규슈에 도착했다.

요시후루는 육로로, 사칸(主典) 오쿠라노 하루자네(大藏春實)는 수로로 나아가 스미토모를 쳤다. 스미토모는 다자이후를 불태워버리고 하카타 만에서 하루자네가 이끄는 조정측 수군을 맞아 싸웠다. 격전 끝에 스미토모 선단은 크게 패하고 8백여 척의 배를 빼앗겼다. 스미토모는 아들 시게타마루(重太丸)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이요로 피했지만, 동년 6월에 이요의 경고사(警固使) 다치바나노 도야스(橘遠保)에게 체포되어 옥사했다(《일본기략》에는 도야스에게 죽었다고 한다). 이후 반란 세력의 잔당으로 비젠에 상륙하여 하리마나 다지마에 출몰했던 후지와라노 후미모토 등도 소탕되었고, 규슈 지역에서도 토벌이 이루어졌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이 불과 두 달 만에 평정된 것에 비하면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은 거의 2년에 걸쳤다. 또한 스미토모의 전투 모습은 《스미토모추토기》로서 추포사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었다 여겨지며, 그 내용의 일부가 《부상략기》에 인용되어 있다.

나카노 신사(中野神社) 터에 세워진 석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神社)로 오카야마현(岡山県) 마쓰시마(松島)의 스미토모 신사(純友神社), 에히메현(愛媛県) 니이하마시(新居浜市)의 나카노 신사(中野神社)가 있다.

  • 나카노 신사(中野神社,[6] 에히메 현 니하마 시): 이곳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한 스미토모의 원령을 모시고 수호신으로 받들었던, 일본 전국에 거의 유일한 신사이다.
  • 스미토모 신사(純友神社, 오카야마 현 마쓰시마): 마쓰시마(松島) 동쪽에 위치한 가마시마(釜島)가 스미토모군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로 마쓰시마에도 출성(出城)하였던 데에서, 섬 주민들이 그를 수호신으로 받들어 사당을 짓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수사(鎮守の社)로 삼게 되었다.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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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후지와라노 요시노리(藤原良範)
  • 어머니: 불명
  • 생모 불명
    • 아들: 후지와라노 아리노부(藤原有信)
    • 아들: 후지와라노 기넨(藤原紀年)
    • 아들: 후지와라노 이오마루(藤原伊王丸, 관례 뒤에는 요시즈미良純로 불렸다 하나 불명)
    • 아들: 후지와라노 나오즈미(藤原眞純,[7] 또는 直純[8] 로도 표기)

스미토모가 후지와라의 혈통이라는 점과 관련해서 유력한 이설이 있는데, 그것은 스미토모가 원래 오오야마즈미(大山積神)를 조상으로 하는 이요의 호족 오치씨(越智氏) 일족으로서 원래는 이마바리(今治)의 다카하시사토(高橋鄕)의 다카하시노 도모히사(高橋友久)의 아들이었는데, 요시노리가 이요의 고쿠시로 부임했을 때 그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 성을 자칭했다는 것이다.

후세에 아리마(히젠 아리마 씨) 집안이나 오무라 집안 등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자손을 칭했다[9]. 지쿠고(筑後)의 가바이케 씨(蒲池氏) 집안도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후예라는 전승이 있다.

근년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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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연구에서는 스미토모가 진압(무력행사 내지 회유)한 해적과, 난을 일으킨 스미토모가 휘하에 거느렸던 해적의 성격 차이가 지적되고 있다.

전자의 해적들은 당시 일본 조정의 기구 개혁으로 인원이 삭감되면서 실직 신세로 내몰린 세토나이카이 부호층 출신의 사인들로, 기존에 자신들이 행해 오던 조세 징수의 기득권을 주장하며 교토로 운반하는 조세의 탈취를 도모하던 존재들이었다.

그에 반해 스미토모가 난을 일으켰을 때에 거느리고 지휘한 후자의 해적은 전자의 해적을 진압하고 나서도 ‘치안 유지’ 명목으로 반강제적으로 현지에 붙들려 있던, 무예에 뛰어난 중급 관리층으로 부모 세대의 요절 등으로 위계 상승의 기회를 잃고 교토의 귀족 사회에서 탈락한, 무공을 세우고 그 훈공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입지 회복 및 상승을 도모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도고쿠 등지의 1세대의 무사와 거의 같은 입장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훗날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에 가담하여 스미토모를 따르게 되는 이들 중급 관리층은 스미토모와 비슷하게 기껏 세운 훈공을 자신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수령층의 하급 귀족들에게 가로채이는 것은 물론, 수령으로 지방에 부임해오는 자들의 착취 대상이 되거나 하면서 수령들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그리고 스미토모가 봉기하자 그에 가담하게 된다.

스미토모의 아버지 요시노리의 사촌형제에 해당하는 후지와라노 모토나가 조헤이 2년부터 5년에 걸쳐 이요노카미 즉 이요의 수령(태수)였던 점도 주목받고 있다. 스미토모는 이요의 태수 모토나의 대행으로서 이요 현지에 파견되어 교토까지 조세를 운반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당시 부호 출신의 사인이 대부분이던 해적 세력들과 관계를 형성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와의 공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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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비슷한 시기에 각기 서쪽과 동쪽에서 일어났던 반란에 대해서 이러한 설이 전한다. 교토에서 조정에 중급 관리로서 출근하고 있던 젊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어느날 함께 히에이 산에 올라 헤이안쿄를 내려다 보았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훗날 난을 일으켜 이 수도를 차지하고, 마사카도는 간무 천황의 자손이니 천황이 되고, 스미토모는 후지와라씨간파쿠가 되자고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히에이 산 위에는 지금도 이 전설과 관련된 '마사카도 바위'도 남아 있다. 당시 구교들의 일기에도 이 두 난에 대해서 '계략을 서로 맞추어'라고 적은 것이 보이는 데에서, 당대에도 두 사람이 서로 함께 모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꽤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사카도는 스미토모를 알지 못했고, 스미토모도 마사카도의 반란을 보고[주석 4] 행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실제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10] 당시 구교들의 의심이나 《오오카가미》 등의 전승과 달리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양자가 공동 모의한 흔적은 없고, 오히려 자신의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하다가 그만 무장봉기로 몰려 '역적'이 된 색조가 더 강하며, 그 시점이 우연히 서로 일치했을 뿐이다.

1976년 일본 NHK 대하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무지개와(風と雲と虹と)에서는 가토 고우(加藤剛)가 배역을 맡은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오가타 겐(緒形拳)이 배역을 맡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교토에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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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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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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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로 덴교 3년(940년) 2월에 반란을 일으킨 스미토모를 회유하기 위하여 일본 조정은 스미토모를 종5위하를 서계하였다.
  2. 다만 이 과정에 대해서는 토착하는 과정에서 스미토모 자신이 해적화하였다거나, 이요에 토착한 뒤에 후임 이요노카미가 된 기노 요시토(紀淑人)에게 협력해 해적들의 귀순을 이끌어냈고 그들의 신망을 모았음에도 기노 요시토에 대한 불만으로 그들에게 추대되어 지도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3. 난보쿠초 시대의 《모로모리키》(師守記) 조와 3년(1347년) 12월 17일조에는 '천하의 병란이 일어났을 때 기도를 행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이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덴교 3년 8월 18일에 병선 4백여 척이 돛을 나란히 하여 이요 국을 포위해 들어와, 백성들과 구고닌(供御人, 궁중에 특산물을 공납하는 집단)이 습격을 당했고, 이어 사누키에도 쳐들어왔다고 한다.
  4. 한편 마사카도에 습격을 받아 고쿠시의 인일(印鎰)을 뺏기고 교토로 도망쳤던 고즈케노스케(上野介) 후지와라노 히사노리는 스미토모의 친숙부인데, 앞서 일어난 마사카도의 움직임이 히사노리의 친족이기도 한 스미토모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순 없다는 견해도 있다.

출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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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洞院 1903, 76쪽.
  2. 尊卑分脈[1]
  3. 松原 1999, 130쪽.
  4. (일본어)시모무카이 다쓰히코 '덴교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에 대한 정치사적 고찰' 《일본사연구》348, 1991, 23~24쪽
  5. 김현경 '일본 헤이안 시대 수군의 존재 여부' 《고대 동아시아의 수군과 해양활동》 도서출판 온샘, 2022, 343쪽.
  6. 941년에 스미토모가 죽음을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카노 산(中野山)에 나카노 신사를 세워 스미토모를 모셨으나, 1869년(메이지 2년)에 니타카 신사(新高神社)의 경내사(境内社)로써 칭해지게 되었다. 그러다 2004년 태풍으로 모조리 무너지고 신사에 모셔져 있던 어령대(御霊代)는 니타카 신사에 합사되었다. [1]
  7. 『아리마계도(有馬系圖)』
  8. 『오무라계도(大村系圖)』
  9.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손자라는 후지와라노 나오즈미의 후손을 자칭. 또한 「성씨가계대사전(姓氏家系大辭典)」에서는 히젠의 호족인 오무라노 아타이(大村直)의 후예라고 했다.
  10. 福田 1995, 50쪽.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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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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