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선 영-유니버시티의 역사
토론토 지하철 노선인 1호선 영-유니버시티(영어: Line 1 Yonge―University)는 1954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노선 연장 및 발전을 거듭해왔다. 토론토는 20세기 초부터 여러 차례 지하철 구상을 시도했으나, 재정 문제와 주민투표 실패로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격한 도시 성장과 교통난 속에서 마침내 지하철 건설이 본격화되었으며, 1954년 유니언–에글린턴 구간이 캐나다 최초의 지하철로 개통되었다.
그 이후 수십 년간 이 노선은 여러 차례 연장되며 오늘날의 체계를 이루었다. 1963년에는 유니버시티 지하철이 개통되어 도심 서부를 연결했고, 1970년대에는 영 지하철이 노스요크까지 뻗어나가면서 교외 개발을 촉진하였다. 1978년 스파다이나선이 개통되면서 '영-유니버시티-스파다이나선'이라고 불리었다.
이후에도 노선은 점차 확장되어 1987년 노스요크센터역 신설, 1996년 다운즈뷰 연장, 2017년에는 본(Vaughan)까지 이어지며 토론토 시 경계를 넘어섰다. 오늘날 1호선 영-유니버시티는 캐나다에서 가장 긴 지하철 노선으로, 토론토 중심부와 교외 지역을 남북 축으로 연결하는 핵심 교통축이다.
초기 역사
[편집]세계 최초의 지하철은 1863년 런던에서 개통했지만 증기 기관차를 사용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다.[1] 이후 1890년에 역시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전기 지하철이 개통하면서 이러한 형태의 교통수단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런던과 뉴욕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지하철이 개통하였다. 이처럼 영국과 인근 도시에서의 발전에 자극을 받은 토론토도 1909년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지하철 구상을 시작하였다. 1909년 4월 29일, 이브닝 텔레그램(Evening Telegram)은 토론토시 엔지니어링 부서와 영국의 한 금융단 사이의 회의가 열렸다고 보도하였다. 이 영국 금융단은 지하 노면전차 노선 두 개를 건설하고 운영할 계획이었으며, 마일(1.6km) 당 100만 달러의 비용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노선은 영 스트리트를 따라 에글린턴 애비뉴에서 프론트 스트리트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고, 두 번째 노선은 이스트토론토에서 시작해 퀸(Queen), 더퍼린(Dufferin), 던다스(Dundas)를 따라 웨스트토론토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2]
이 제안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그 배경에는 토론토시와 토론토철도회사(Toronto Railway Company, TRC) 간 오랜 갈등이 있었다. TRC는 1891년에 토론토 시내의 노면전차 운영에 대한 독점 권한을 부여받아 1921년까지 토론토의 대중교통을 운행하게 되었지만, 도시가 확장할 때 시에서 새로 편입된 지역에도 운행해달라는 요구를 회사가 거부하였다.[3] 이에 따라 법적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사건은 영국 추밀원까지 올라갔으며, 그곳에서 회사가 승소하였다.[4] 이와 더불어 TRC의 서비스 품질이 좋지 않다는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1891년 당시에는 지하 노면전차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TRC의 독점 계약에는 지하 노선은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시가 지하 철도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쟁 교통 수단을 유치하면, TRC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5]
토론토시는 이에 따라 1909년 6월 교통망 전반을 검토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지하철 건설을 강력히 지지하던 시 재무담당관 호레이쇼 C. 호켄(Horatio C. Hocken)이 포함되어 있었고, 조셉 올리버(Joseph Oliver) 토론토 시장도 "지상에서 원하는 철도를 얻지 못한다면, 지하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며 지하철 건설에 지지를 보냈다.[5] 그해 가을, 토론토시 토목 기사 모이스(Moyes)는 시의회에 예비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지하철 건설 비용이 약 5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였다.[5] 11월 23일 열린 시의회에서는 지하철 건설 계속 추진에 대한 주민투표를 두고 4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찬반 의견이 모두 존재했지만, 결국 시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사안을 주민투표에 부치기로 하였다.[5]
주민투표
[편집]호레이쇼 C. 호켄은 1910년 토론토 시장 선거에서 지하철 건설 문제를 자신의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고, 주민투표는 1910년 1월에 실시되었다. 투표 결과는 찬성 19,268표, 반대 10,697표로 가결하였다. 하지만 시장 선거에서는 지하철을 높은 비용을 이유로 반대한 조지 R. 기어리(George R. Geary)가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투표에도 불구하고 지하철 사업은 곧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6]
토론토시는 지하철 건설에 대한 검토를 계속 이어가며 여러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1910년에는 뉴욕의 제이콥스 & 데이비스(Jacobs & Davies) 회사 소속의 미국인 엔지니어 제임스 포지(James Forgie)가 시의 의뢰를 받아 지하 및 지상 혼합 교통체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7] 그의 보고서는 1910년 9월 1일에 시의회에 제추되었고, 총 2,300만 달러 규모, 18.7km의 노선망을 제안하였다.[5] 이 노선망은 프론트 스트리트와 영 스트리트의 교차점에서 시작해 세 갈래로 뻗어나가는 구조였다. 세 개 노선 중 하나는 베이 스트리트와 영 스트리트를 따라 북쪽으로 세인트클레어 애비뉴(St. Clair Avenue)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다.[7]
1911년 가을, 토론토시는 지하철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베이 스트리트와 프론트 스트리트에서 세인트클레어 애비뉴까지 이어지는 4.8km 길이의 지하철을 짓기 위해 시멘트 터널 건설 입찰을 공고하였다.[8] 가장 낮은 입찰가는 260만 달러였으며, 여기에 선로, 신호 시스템, 전력 공급 장치, 차량 구입 비용 등을 포함하면 전체 비용은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5]
1912년 1월 1일, 지하철 건설 비용을 주민투표에 부쳤으나 이번에는 시민들의 지지가 크지 않았다. 다른 인프라 사업으로 인해 세금 부담에 지친 시민들과, 당시 토론토 시내 다섯 개 주요 신문 가운데 네 곳이 지하철 건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한 영향으로, 시민들은 반대 11,291표, 찬성 8,486표로 지하철 건설을 부결하였다.[8] 호레이쇼 호켄은 1911년 1월 1일 다시 토론토시 재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12년에는 최고행정관(사실상 시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는 1910년 지하철 이슈를 두고 지선에서 낙선했지만, 1912년 주민투표까지 계속해서 지하철 건설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번 패배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이 사안을 거론하지 않기로 하였다.[9]
2차 세계대전과 도시 성장
[편집]토론토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며 계속 성장하였고, 이에 따라 자동차에 대한 열광도 함께 커져갔다. 토론토의 도로에는 차량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31년, 알버트 해커 토론토 시의원은 애비뉴 로드와 세인트클레어 애비뉴에서 프론트와 요크 스트리트까지 남북으로 연결하고, 프론트, 스콧, 빅토리아, 제럴드를 따라 시내 남부 구간에 넓은 고리를 그리는 지하철 노선을 제안하였다. 토론토 교통국은 이 계획을 검토한 결과 경제적 타당성이 없으며, 토론토 인구가 상당하게 증가하기 전까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대공황은 노면전차 노선의 확장을 최소한으로 억제하였고, 지하철 신설 계획에도 제동을 걸었다.[5]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에 따라 자동차 구매는 중단되었고, 시민들은 다시 전차를 이용하였지만, 주거지에서 일터로 출근하는 시민들의 수요로 토론토의 도로와 대중교통망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15년 동안 억눌려왔던 경제 발전과 도시 개발이 갑자기 되살아나 폭발적으로 진행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 같은 전망은 TTC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토론토가 교통난에 시달리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1941년 10월, 토론토 교통국은 두 개의 지하 노면전차 노선을 제안하였는데, 남북 노선은 웰링턴, 요크, 프론트 스트리트 지하로 루프를 형성하고, 베이 스트리트를 따라 블루어를 지나 북쪽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램즈든 공원을 통해 북동쪽으로 잠시 방향을 튼 후, 이 지하철은 영 스트리트 아래를 따라 세인트클레어까지 이어지고, 이후 지상으로 올라온다. 기존 벨트 라인 철도의 노반을 활용한 새로운 노선은 포레스트힐을 지나 요크 타운십까지 노면전차를 연결할 계획이었다. 한편 동서 노선은 퀸 스트리트를 따라 계획되었다.[10]
TTC는 1942년 1월 22일 이 계획을 토론토시에 제출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에 다시 계획을 수정하여, TTC는 에글린턴 애비뉴에서 시작해 영 스트리트 지하를 따라 프론트 스트리트까지 남하한 뒤, 프론트를 따라 유니언역까지 이어지는 지하철 노선을 제안하였다.[11] 1946년 1월 1일, 토론토 주민투표에는 다음과 같은 문항이 실렸다. "도미니언(연방) 정부가 전체 비용의 5분의 1을 부담하고, 나머지 비용은 도시 서비스 교체 및 개선과 관련하여 시의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범위 내에서만 납세자 부담이 이루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토론토 교통국이 제안한 급행 대중교통 체계를 추진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쉽게 말해 제안은 연방 정부가 비용의 20%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TTC의 수익으로 충당하여, 시 납세자들은 도로 복구나 수도관 이전 등 도시 기반시설의 이전 및 개선에만 일부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지하철 건설안은 찬성 69,935표, 반대 8,630표로 압도적인 찬성으로 승인되었다. 토론토 시의회는 1946년 4월 26일, 영 지하철 건설을 공식으로 승인하였다.[12]
착공
[편집]1946년 주민투표는 연방 정부가 전체 비용의 20%를 보조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하철 건설을 승인하였지만, 이 연방 지원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1945년 10월 3일, 연방 재건부 장관 C. D. 하우(C. D. Howe)는 TTC에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연방 정부와 온타리오주 정부가 전쟁 후 일자리 프로그램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협상은 무산되고 말았다.[12] 이에 따라 토론토시는 지하철 건설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고, 계획을 축소하였다. 퀸 스트리트 지하 노면전차 노선은 잠시 잊혀졌고, 기존에 4,230만 달러가 들 것으로 예상되었던 두 노선 계획은 차량 구매비 350만 달러를 포함해 약 2,890만 달러로 축소된 단일 노선으로 바뀌었다.[11]
공사는 전쟁 후 자재 부족으로 2년 동안 지연된 1949년 9월 8일에 시작되었으며, 착공식은 방송 진행자 몬티 홀(Monty Hall)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온타리오주 주지사인 레이 로슨(Ray Lawson)이 항타기에 올라 첫 번째 솔저 빔을 박는 레버를 직접 작동시켰다. 이 행사는 토론토의 모든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이후 공식 인사단은 로열 요크 호텔로 이동하였고, 실제 공사 인부들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11]
지하 구간 7.4km의 건설 방식으로는 절개식 공법으로 진행하였다. 이 방법은 터널 굴착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공사 비용이 훨씬 저렴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영 스트리트를 따라 큰 도랑을 파고, 기존의 지하 설비를 이전한 후, 강철 가로보를 설치하여 고정하였다.[11] 이 강철 가로보 위에는 무거운 목재가 얹혀 데크를 형성했으며, 이 데크 위로 도로 교통을 재개하면서 지하에서는 계속해서 공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이 공사로 약 130만 세제곱미터의 토사가 제거되었고, 약 12,700톤의 철근과 140만 포대의 시멘트가 사용되었다.[11] 이렇게 파낸 흙과 자재는 트럭을 통해 애쉬브리지스베이(Ashbridge's Bay)로 운반되었으며, 이곳에서 온타리오호를 매립하여 새로운 토지를 조성하는 데 활용되었다.[13]
프론트 스트리트에서 북쪽으로 공사가 진행되던 중, 작업 인부들은 퀸 스트리트까지 이어지는 두께 0.9~2.4m의 단단한 암반층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파가 필요했고, 폭파 작업은 매일 정오와 오후 4시 30분, 하루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10] 대부분 지하철 공사는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한 차례 심각한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애들레이트 스트리트 남쪽 지역이 심각하게 침수되어 곳곳에서 수심이 최대 6미터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 사고는 1950년 7월 24일 폭우 직후 발생하였으며, 임시로 설치해 둔 우수관이 붕괴되면서 대형 수해로 이어졌다.[14]
임시 데크의 사용은 절개식 공법 공사에 따른 교통 혼란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도로는 초기 굴착 작업에 따라 도랑이 충분히 깊어져 데크를 설치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로 복구를 위해 데크를 철거할 때만 통제되었다.[14] 하지만 노면전차의 우회 운행은 여전히 불가피하였다. TTC는 기존에 선로가 깔려있던 도로를 따라 장거리 우회를 시키는 대신, 알렉산더 스트리트(Alexander Street)와 같은 이면 도로에 임시 선로를 새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 임시 선로는 여분 자재나 잉여 물자로 시공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TTC는 임시라고 해서 선로를 단순히 지면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도로에 매립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13]
절개식 공법은 많은 주택의 철거를 여전히 수반했지만, 공사가 완료된 후에는 재개발이 가능한 토지를 남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철거 대상이 아닌 건물 아래로 지하철이 지나갈 경우에는 지하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건물을 안정적으로 지지하기 위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였다. 기초와 지하실 바닥 아래에는 콘크리트 받침대를 임시로 설치했고, 굴착이 몇 미터 더 깊어지는 동안 지하실 바닥은 일시적으로 철거되었다.[13] 이후 콘크리트 케이슨을 타설해 이를 통해 철제 보강빔의 한쪽 끝을 지지하게 했으며, 이 보가 위의 건물을 떠받치고 동시에 지하철 터널 천장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였다. 지하철 구조물이 완성된 후에는 굴착된 공간을 다시 메우고 건물의 지하실 바닥도 복원하였다.[13]
처치 스트리트(Church Street)와 대번포트 로드(Davenport Road) 북쪽에서는 지하철 노선이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곳은 TTC에서 유일하게 명판이 부착된 터널 출입구로, 엘리스 포털(Ellis Porta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엘리스 포털에서부터 노선은 캐나디안 퍼시픽 철도(CP) 선로 근처, 옛 노스토론토역 인근까지 절개 구간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고, 이 지점에서 다시 지하로 들어가 두 블록 북쪽의 쉐프츠버리 애비뉴(Shaftesbury Avenue)까지 이어졌다.[13] 이 구간은 선로 아래를 통과하도록 굴착되었으며, CP 측에서 절개식 공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굴 방식으로 짧게 굴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다시 지상으로 나와 우드론 애비뉴(Woodlawn Avenue)까지 이어졌고, 여기서 다시 지하로 들어가 세인트클레어역을 지나 영 스트리트를 횡단하며 로턴(Lawton) 북쪽에서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13]
벨트 라인 철도 인근에는 데이비스빌 차량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넓은 부지가 조성되었다. 이 부지에는 원래 알렉산더 뮤어 기념 정원이 있었는데, 공사에 따라 공원이 철거되고 현재 위치인 영 스트리트와 세인트에드먼드 드라이브(St. Edmund's Drive)에 다시 조성되었다. 공원 이전에는 10만 달러가 소요되었고, 새 공원은 1952년 2월 28일에 개장하였다.[15]
노선은 지상 개방식 절개 구간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버윅(Berwick)에서 다시 지하로 들어간다. 에글린턴역 건물은 원래 TTC의 에글린턴 전차 차고 부지 위에 지어졌는데,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 전차 차고는 노면전차 운행 중단을 대비해 버스 및 트롤리버스 차량기지로 개량하였다.[16]
당시 영 지하철은 1953년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한국에서 6.25 전쟁의 발발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전쟁에 따라 철강이 부족해지면서 공사는 1954년까지 지연되었다. 최종적으로 영 지하철 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총 6,700만 달러로 집계되었다.[17]
영 지하철 개통
[편집]5년 간의 공사와 준비 끝에, 영 지하철은 개통 준비를 마쳤다. 개통식은 1954년 3월 30일 아침에 진행되었다. 온타리오 주지사 레슬리 프로스트(Leslie Frost), 토론토 시장 앨런 램포트(Allan Lamport), 토론토 통합시 의장 프레더릭 가디너(Frederick Gardiner) 및 토론토 교통국 의장 W. C. 맥브라이언(W. C. McBrien)이 공식 개통을 선언하였다.[11] 이날 오전 11시경 데이비스빌역에는 연방, 주, 시의 각급 정치인들과 TTC 직원들, 언론인, 그리고 1952년 9월 8일에 개국한 CBLT 방송국의 초기 텔레비전 카메라까지 모여들어 여러 축하 연설을 들었다.[11]
맥브라이언 의장은 연설에서 퀸 스트리트 지하 노면전차 공사의 즉각 착수를 요구하며 도심 혼잡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환승 주차장, 일방통행 도로, 출퇴근 시간 유연제 도입 등 광범위한 조치를 제안했다. 그는 영 지하철이 "토론토의 교통 문제를 해결하는 최종 해법이 아니라, 이 괴물과 싸우기 위한 시작일 뿐"이라고 강조했다.[11] 또한 향후 더 많은 지하철이 건설되어야 할 것이며, TTC는 정부의 지원 없이는 추가 노선 건설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불과 5년 후 현실이 되었다.[11]
마침내 프로스트 주지사와 램포트 시장은 레버를 앞으로 밀어 신호등을 황색에서 녹색으로 바꾸었다. 지하철이 공식적으로 개통된 순간이었다. 초청된 600명 이상의 인사들이 데이비스빌역을 11시 50분에 출발한 열차에 탑승해 에글린턴역으로 향했다. 열차는 11시 56분에 에글린턴을 떠나 12시 10분에 유니언역에 도착했다. 이후 개통식은 유니언역 앞에 있는 로열요크 호텔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었다. 오후 1시 30분, 영 지하철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아침에 노면전차를 타고 출근했던 이들은 저녁에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였다.[11]
지하철 개통과 노면전차 폐지 이후, 영 스트리트를 복구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토론토의 주요 간선도로 복구 작업은 1954년 내내 계속되었으며, 노면전차 선로는 철거되거나 아스팔트로 덮였다. 영 스트리트 재개통식은 1954년 10월 20일로 예정되었으나, 허리케인 헤이즐이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13] 토론토에 도달했을 때에는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되었지만, 이 재해로 1억 8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 피해를 일으켰고 80명이 넘는 토론토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재개통식은 신속하게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 행사로 전환되었다.[18]
그러나 영 지하철은 단숨에 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승객들이 새로 개통한 노선을 탑승하려고 몰려들었고, 새로움이 시들어진 이후에도 통근객들은 계속해서 지하철을 이용하였다. 원래는 이용객이 적은 시간대에 운행될 예정이었던 2량 편성의 글로스터 열차는 거의 보기 힘들어졌고, 4량 편성이 최소 기준이 되었으며, 6량 편성이 일반적인 운행 형태가 되었다.[19] 결국 승객 수가 증가하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8량 편성의 글로스터 열차가 운행하였다.[13] 이와 마찬가지로, 몬트리올 로코모티브 웍스(Montreal Locomotive Works)와 호커 시들리(Hawker Siddley)에서 제작된 더 긴 차량들이 도입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2량 편성의 호커 열차가 운행되었지만 곧 4량이 최소 기준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모든 시간대에 6량 편성이 표준으로 자리잡았다.[13]
유니버시티 지하철
[편집]1954년 영 지하철 개통 이후 토론토시와 TTC의 관심은 동서축 노선 건설로 옮겨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퀸 스트리트를 따라 지하 노면전차 노선을 짓는 것이였는데, 1954년에 되자 토론토시는 본격적인 지하철 건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TTC는 이에 대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TTC는 블루어 스트리트의 교통량이 퀸 스트리트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20] 이미 블루어 노면전차는 퀸 노면전차보다 더 많은 승객을 실어나르고 있었고, 도로 위의 자동차 수가 많아지면서, TTC는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TTC는 동서 방향의 지하철 노선을 블루어 스트리트를 따라 건설할 것을 추진하였다.[21] 처음에는 시청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여러 대안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에는 U자형 노선도 있었다.[22] 이 노선은 외곽에서는 블루어 스트리트를 따라가다가 도심에 가까워지면 퀸 스트리트를 따라가는 구조였는데, 결국 TTC의 계획이 관철되어 블루어-댄포스선이 다음 우선 과제로 결정되었다.[22]
하지만 이러한 노선이 모두 건설되기 전에, 블루어-댄포스선과 영 지하철 사이에 연결 구간이 먼저 마련되어야 했다. 새로 건설되는 첫 번째 구간은 영 지하철의 남부 종점인 유니언역에서 유니버시티 애비뉴(University Avenue)를 따라 북쪽으로 연장해, 향후 세인트조지에서 두 노선을 연결시키는 형태였다.[23] TTC의 표현을 빌리자면 "4,500만 달러가 투입되는 유니버시티선은 상업, 금융, 정부 및 주요 기관들이 밀집한 지역에 빠르고 편리한 접근을 제공하고, 도심 지역과 블루어역 사이 수송량을 두 배로 늘려 영 지하철의 출퇴근 시간대 혼잡을 완화"하는 것이 목표였다.[23]
당시 영 지하철의 승객 수는 예상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예외적으로만 운행되던 8량 편성의 글로스터 열차가 일반적인 운행 형태로 자리 잡았고, TTC는 블루어 노선을 이용하는 교외 통근객들이 도심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영 지하철 블루어 이남 구간이 그 수요를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23][24] 온타리오 주정부의 재정 지원 덕분에 블루어-댄포스선이 킬에서 우드바인까지 동시에 개통하지만, 그보다 앞서 유니버시티 지하철이 먼저 건설되어야 했다. 1959년 11월 16일, 레슬리 프로스트 온타리오 주지사가 착공식을 진행하면서 길이 3.8km에 달하는 이 노선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1963년 2월 28일에 개통하였다.[24]
유니버시티선은 6개 역(베이역 아랫층 승강장까지 포함하면 7개)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전의 영 지하철에서 사용된 건설 방식과는 몇 가지 다른 특징이 있었다. 공사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열차 소음과 진동, 그리고 지하철 공사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절개 공법이 병원과 온타리오 주의회 건물에 미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스구드역과 뮤지엄역 사이 구간은 터널을 굴착하였다.[23] 이 구간 외에도 TTC는 블루어와 애비뉴 로드(Avenue Road) 교차로 인근에 길이 49m의 시험 터널 구간을 설치했으며, 이는 이코스 베더(Icos-Veder) 공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 방식은 터널 벽이 들어설 위치에 먼저 도랑을 파고, 그 안을 철근과 콘크리트로 채운 후, 터널 천장은 흙 위에 직접 콘크리트를 부어 만드는 것이다. 콘크리트가 굳은 뒤에는 천장 아래의 흙만 파내면 완성되는 구조로, 절개 공법과 유사한 형태의 터널을 만들 수 있지만, 주변 지역의 혼란은 훨씬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25] 하지만 TTC는 이 방식이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점을 들어, 이후 이 공법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23]
유니버시티선의 또다른 변화는, 대부분의 지하철역 이름을 도로명이 아니라 역 근처 주요 명소를 따서 지었다는 점이다. 역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TTC는 이러한 '대체 명칭'을 사용하는 역에는 실제 교차 도로명을 부역명으로 병기하였다. 하지만 유니버시티선이 개통한 이후, 이러한 병기 표기 관행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23]
초기에는 유니버시티선 승객 수가 예상보다 적었다. 대부분 승객들은 도심 내 목적지에 더 가까운 역들이 많다는 점에서 영 지하철을 선호하였다. 이에 따라 영-유니버시티선은 종종 유니언역에서 중간 종착하였고, 마침내 1969년 6월 23일부터 TTC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9시 45분 이후, 그리고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유니버시티선의 운행을 전면 중단하였다.[23] 유니버시티선이 운행하지 않는 시간대에는 5번 애비뉴 로드 버스가 5B 지선을 통해 에글린턴에서 프론트 스트리트까지 운행하였으며, 중간에 블루어-댄포스선 승객을 싣기 위해 세인트조지역으로 우회하기도 하였다. 이 운행 방식은 1978년에 스파다이나 지하철이 개통할 때까지 유지되었다.[26]
운행 계통 변경
[편집]1966년, 새로운 노선인 블루어-댄포스선이 개통하면서 유니버시티선은 이 노선과 연결되었다. 개통 초기, TTC는 블루어-댄포스선과 영-유니버시티선을 연결 운행하는 인터라이닝(interlining)이라는 운행 방식을 시험했는데, 이는 블루어선 열차의 둘 중 하나를 유니버시티선의 삼각선을 통해 도심을 경유해 에글린턴까지 운행하도록 한 방식이었다.[27] 이 삼각 연결을 구현하기 위해, 세인트조지역과 베이역은 복층 구조로 건설되었다. 한 층에서는 유니버시티선 열차가 블루어-댄포스선의 양쪽 종점으로 연결되었고, 다른 승강장에서는 도심 방향으로 이동하는 열차를 탑승할 수 있었다. 다른 층에서는 블루어선 열차가 동서 방향으로 운행하였다. 세인트조지역에서는 유니버시티선이 윗층에 정차하였고 블루어선 열차가 아랫층에 정차하였으며, 베이역에서는 그 반대였다.[27]
블루어-댄포스선 개통 6개월 후, TTC는 인터라이닝을 6개월 동안 중단하였는데, 이후 승객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지만 명확한 선호도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TTC는 인터라이닝을 폐지하기로 하였고, 베이역 아랫층 승강장은 일반 승객에게 폐쇄되었다.[27] 하지만 유니버시티선의 뮤지엄역과 블루어선의 영역 사이의 연결 선로는 지금까지도 차량 이동을 위해 유지되고 있으며, 스파다이나역 동쪽에서도 세인트조지 윗층 승강장과 블루어-댄포스선을 잇는 연결 선로가 남아있다.[28]
영 지하철 연장안
[편집]1960년대에 들어서서 TTC는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TTC는 요금 수입만으로 운영비와 영 지하철을 포함한 자본 지출을 충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토론토 주위로 자동차 위주의 저밀도 성장이 지속되면서 승객 수가 줄어들고 TTC의 적자는 점차 악화되었다.[29] 결국 TTC는 1966년 블루어-댄포스 지하철을 개통하기 위해 주와 시 정부의 보조금 지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TTC에 대한 보조금이 증가함에 따라, 통합시 의회는 TTC의 우선순위에 대한 통제권도 점점 강화해 나갔다. 1960년대에는 TTC의 향후 우선 과제를 둘러싸고 통합시 의회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토론토 시의원들은 퀸 스트리트를 따라 새로운 지하철 건설을 주장한 반면 교외 지역 의원들은 버스 증편 및 교외 주민들에게 더 높은 요금을 부과하는 구간 요금제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30] 이를 두고 의회 내 논쟁은 특히 격렬했으며, 노스요크와 이토비코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TTC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기 위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까지 제기한 바 있다.[31]
이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지하철 건설을 계속하기 위해 통합시 의장 프레더릭 가디너는 새 노선을 두고 의회 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기존 노선을 교외로 연장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더 수월하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기존 노선을 연장하는 것이 비용도 덜 들고, 동시에 교외 자치단체들이 요구해온 대중교통 개선도 일정 부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유로, 1960년대 초에는 블루어-댄포스선을 서쪽으로 이즐링턴과 동쪽으로 워든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승인되었다.[21] 이러한 연장 구간이 건설되는 동안, 관심은 점차 북부 교외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영 지하철을 노스요크까지 연장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실용적인 선택이였지만, 그 자체로도 상당한 타당성을 갖춘 계획이었다. 에글린턴 북쪽의 영 스트리트는 교통량이 매우 많았으며, 종점 바로 북쪽에는 옛 노스토론토 타운이 위치해있었고, 이 지역은 에글린턴 남쪽의 기존 영 지하철 주변과 유사한 인구 밀도를 보였다.[29] 물론 영 블루버드를 지나면 인구 밀도가 급격히 낮아졌지만, 이곳은 토론토시와 노스요크의 경계이자 영 전차의 회차점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스요크 자치구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영과 셰퍼드 교차로 부근에 노스요크의 도심 중심지를 개발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32]
영 지하철 연장 계획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 통합시공식계획 초안에서였으며, 여기서 영 지하철을 에글린턴에서 셰퍼드까지 연장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당시 스파다이나 고속도로(Spadina Expressway)와 연계된 급행 전철 노선 계획이 우선시되었고, 이에 따라 연장안은 잠시 뒷전으로 밀렸다.[29] 하지만 1961년 3월 7일, 노스요크의 요청에 따라 통합시 의회가 승인한 2만 달러 규모의 타당성 연구가 추진되면서 논의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29] 1964년, TTC에 의뢰해 본격적인 조사와 검토가 이루어졌고, 1965년에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설계안들이 등장하였다. 1965년 9월 16일, 통합시 도시계획 보고서는 스파다이나선 대신 영 지하철 연장을 차기 지하철 건설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29] 이는 스파다이나 고속도로의 노선 확정에 불확실성이 컸기 때문인데, 고속도로 노선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에 연계된 지하철 노선 역시 최종 노선을 조기에 결정하기 어렵고, 이는 지하철 건설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통합시 의회는 1967년 1월 25일, 영 지하철을 에글린턴 애비뉴에서 셰퍼드 애비뉴(Sheppard Avenue)까지 연장하는 계획을 공식 승인하였다.[29]
영 지하철 연장안에 대한 본격적인 타당성 조사는 1961년 6월에 발표되었는데, 영 지하철을 에글린턴에서 스틸즈 애비뉴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33] 이는 영 스트리트 동쪽을 따라 호그스할로우와 돈강 서쪽 지류를 낮은 고도의 교량으로 횡단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건설은 두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권장되었는데, 1단계는 1970년까지 셰퍼드 애비뉴까지 연장하고, 2단계는 1980년에 셰퍼드에서 스틸즈까지 연장하는 것이었다. 노선 길이는 10.3km로 사업비는 1961년 기준 약 1억 600만 달러로 추산되었으며, 정차역은 글렌케언, 로렌스, 영 블루버드, 요크밀스, 셰퍼드, 엠프레스, 핀치, 커머, 스틸즈 등이었다.[29]
그러나 1964년에 작성된 TTC의 보고서에서는 실제 건설된 노선과 더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TTC는 글렌케언, 영 블루버드, 엠프레스와 같이 덜 중요한 교차로는 생략하고 해당 지역은 영 스트리트를 따라 병행하는 버스 노선으로 지역 교통을 보완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영 스트리트 서쪽을 따라 연장 구간이 셰퍼드까지 이어지며, 호그스할로우의 돈 계곡 서쪽 지류 위에는 약 800m 길이의 높은 교량을 건설하고, 요크밀스역을 고가역으로 짓는 것을 제안했다. 이는 '중요한 건축 및 공학 성과'로 평과되었다.[29] 한편, 이 보고서는 스틸즈 애비뉴까지의 추가 연장은 지지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마컴과 본 지역의 상하수도가 미비하여 지하철이 유도할 개발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29]
이 시점에서 영 지하철 북부 연장 사업은 일부 논란에 직면하였다. 지역 주민들과 토지 소유자들은 최대 275채의 주택이 철거될 수 있다는 점과 함께, 노선 주변의 소음 발생 가능성에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높은 교량 건설 계획은 소규모 주민 단체의 공격 대상이 되었는데, 이들은 다리 건설로 부동산 가치가 하락할 것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반발을 고려해, 노선은 영 스트리트 바로 밑을 따라 터널로 건설하는 방안으로 변경되었다. 이 변경으로 약 160만 달러의 부동산 수용 비용이 절감될 수 있었지만, 돈강 하부를 굴착해야 하는 난이도로 비용 절감 효과는 없었다.[29]
이와 동시에 TTC의 재정난도 계속되었다. 1967년, 통합시 의회는 도시 철도에 대한 지방세를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TTC는 연간 170만 달러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 예산은 지하철 건설 비용에 투입되었다. 최종 계획은 1967년 온타리오주 지방자치위원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공사는 1968년 10월 3일에 착공하였다. 총 길이 6.47km의 노선 건설비는 7,960만 달러였고 1972년에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34][29]
1969년 10월 17일, 통합시 의회는 영 지하철을 셰퍼드에서 핀치까지 추가 연장하는 방안을 승인하였다.[34] 이 연장은 핀치 애비뉴에서 두 블록 북쪽에 위치한 온타리오 하이드로(Ontario Hydro)의 송전선 부지의 존재와, 이 부지에 대규모 환승 주차장을 조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힘입어 제안되었다. 주 지방자치위원회는 1970년에 이 연장을 승인했고, 1971년에 착공했으며, 이에 따라 기존 사업에 3,750만 달러가 추가 투입되었다.[29]
영 지하철 2단계 연장 구간에는 핀치역 한 곳만 포함되었는데, 이는 노스요크가 파크홈 애비뉴에도 두 번째 역을 건설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과였다. 해당 부지는 앞서 언급된 가칭 엠프레스(Empress)역이 위치한 곳으로, 노스요크 시립센터의 건립 예정지이기도 했다. 당시 해당 지점에는 나중에 역을 추가할 수 있도록 선형을 평탄하게 설계해 두었지만, TTC는 이 지역에 역을 설치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결국 노스요크센터역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착공되었다.[35] 핀치역은 셰퍼드 연장 이듬해인 1973년에 개통할 예정이었다.[34]
북부 연장 개통
[편집]영 지하철 북부 연장 사업은 여러 가지 문제로 난항을 겪었다. 노동자 파업 장기화, 테딩턴파크 애비뉴에서의 유사 발견, 호그스할로우의 습한 토양 조건 등으로 공사는 지연되었고, 결국 원래 계획이었던 셰퍼드까지의 전 구간 개통 대신, 1973년 3월 31일에 요크밀스까지만 우선 개통하기로 하였다. 남은 구간은 1년 후인 1974년 3월 30일, 영 지하철 개통이 20주년을 맞는 날에 개통하였다.[36]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요크밀스와 로렌스 두 역은 계획된 에스컬레이터 여덟 대가 설치되지 않은 채 개통되었다. 미설치된 에스컬레이터 대부분은 두 번째 출입구에 위치할 예정이었으며, 두 역은 토론토 지하철에서 가장 깊은 구조였기 때문에, TTC는 에스컬레이터 설치 전까지 해당 출입구를 개방하지 않기로 했고, 실제 설치는 그해 6월까지 지연되었다.[36]
영 지하철이 요크밀스까지 연장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73년 3월 30일 금요일, 지하철 연장 개통식이 로렌스와 요크밀스역에서 열렸다. 1968년에 스카버러와 이토비코 지하철 연장 개통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던 만큼, 정치적으로 노스요크도 이에 못지않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29]
이날 오후 2시경, 약 400명의 귀빈과 관계자들이 에글린턴역에 모여 6량 편성의 H-2 차량으로 구성된 특별 열차에 탑승하였다. 열차 앞에는 "Official Opening - Yonge Subway Extension(영 지하철 공식 개통)"이라는 표지가 부착되었고, 데이비드 크롬비 토론토 시장이 이 열차를 에글린턴역 선로에 설치된 현수막 "Get Ready - North York, Here Comes the Subway(준비하세요, 노스요크! 지하철이 갑니다!)"를 통과시키며 개통식을 이끌었다.[29]
열차는 로렌스역에 도착했고, 이곳에서는 수많은 시민들과 멜 라스트먼 노스요크 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롬비 시장과 라스트먼 시장은 함께 상징적인 신호기를 작동시켜 열차를 요크밀스까지 출발시켰고, 라스트먼 시장은 이후 직접 운전대를 잡아 요크밀스역까지 운행하였다. 역에 도착한 뒤에는 또 다른 군중 앞에서 개통 기념 연설이 이어졌으며,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Davis) 온타리오 주지사와 교통통신부 장관 고든 캔턴(Gordon Canton)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념 열차가 요크밀스역을 출발한 직후 로렌스와 요크밀스역은 그날 오후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되었으며, 정식 운행은 다음 날인 3월 31일 오전 6시에 시작되었다.[29]
스파다이나선
[편집]1960년대에 스파다이나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지하철 노선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등장하였다.[37] 시카고는 이미 1950년대에 아이젠하워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실험을 한 바 있었다.[38] 일부에서는 이 제안이 고속도로 건설 계획에 반대하는 이들을 달래려는 교외 정치인들의 시도였다고 본다. 하지만 이 계획은 트로이의 목마와 같다며 비웃음을 샀고, 토론토 시내 비평가들은 스파다이나선이 영 지하철만큼의 승객을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39] 비록 북서부 노선으로서 원하는 만큼 서쪽으로 뻗지 못했지만,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따라 건설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TTC도 스파다이나 지하철이 과도하게 혼잡한 영 지하철 노선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고 보았다.[39]
하지만 토론토시는 지하철을 새로 짓는다면 반드시 퀸 스트리트에 지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는 스파다이나선의 낮은 수요 전망 때문이었다. 당시 토론토시가 통합시 의회의 절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시의 의견이 관철되었다.[30] 하지만 1967년, 주 정부가 토론토 통합시를 재편해 13개 지자체를 6개로 통합하고 교외 지자체에 과반 의석을 부여하자 상황이 바뀌었다.[40] 스파다이나 지하철은 곧바로 영 지하철 연장 다음의 우선순위로 지정되었고, 퀸 노선은 그 이후로 추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퀸 지하철은 건설되지 않았다.[30]
스파다이나선의 구체적인 노선을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제안된 노선은 윌슨 애비뉴 근처에서 시작해 스파다이나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따라 남쪽으로 에글린턴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고속도로는 끝났지만 지하철은 계속 이어져 노드하이머 협곡을 따라 지상으로 지나가다가 카사 로마와 스파다이나 로드 밑으로 터널을 뚫고 세인트조지역까지 잇는 방안이였다. 하지만 토론토시와 요크 자치구는 협곡을 따라 지하철을 건설하는 데 우려를 표하고, 대신 노선을 배서스트 스트리트를 따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39] 일부는 배서스트 스트리트나 더퍼린 스트리트가 고속도로 주변의 저밀도 개발 지역보다 인구 밀도가 더 높아 지하철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스요크 시장 제임스 서비스는 심지어 스파다이나선을 대번포트 로드를 따라 내려와 로즈데일 남쪽에서 영 노선과 합류시키고, 번갈아 열차가 영-유니버시티 노선을 루프 형태로 베이역 아랫층 승강장을 거쳐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으로 운행하도록 제안하기도 했다.[39] 최종적으로는 비용이 더 저렴한 노선이 선택되었고, 협곡 녹지를 보존하기 위해 노드하이머 협곡 구간은 터널로 건설하기로 하였다. 주 정부는 1973년 1월 18일 이 계획을 승인하고 이후 곧바로 공사가 시작되었다.[39]
스파다이나 지하철은 영 지하철 북부 연장과 마찬가지로 파업 문제를 겪었다. 전기 기사들의 파업으로 신호 작업이 지연되면서 개통일은 1977년 10월 15일에서 뒤로 밀리게 되었다.[39] 결국 문제가 해결되어 1978년 1월 27일에 개통식이 열렸다.[39] 이날 오후 2시, 윌슨역과 세인트앤드루역에서 출발한 VIP 전용 열차 두 대가 세인트클레어 웨스트역을 향해 운행되었다. 세인트클레어 웨스트역에서는 VIP와 언론 관계자들이 연설을 듣고 시설을 둘러보았다. 개통을 기념해 새로 인도된 CLRV 차량과 PCC, 위트 차량도 전시되었다. 다음 날에는 스파다이나선 역이 무료로 개방되었다.[39]
개통 초기 몇 주 동안은 특히 노선의 지상 구간에서 선로 전환기 문제로 운행에 자주 차질을 빚었다. 초반 이용객 수는 적었지만 연말까지는 예측된 하루 8천 명의 승객에 도달했다. 낮은 수요에 대해서는 '장기적 투자'라는 점이 강조되었으며, 노스요크의 지역 개발을 촉진하고 북부 교외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통근객들에게 대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논리였다.[39] 1968년에 8천만 달러의 비용으로 구상된 이 노선은, 최종적으로 길이 9.9km에 2억 1,200만 달러의 비용이 들어갔다.[39]
노스요크센터역
[편집]노스요크센터역은 노스요크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가 끝나기 전까지 건설되지 않았다. 노스요크는 조용한 주택가 위주의 토론토 교외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토론토 도심에 맞먹는 시내를 가진 도시로 성장할 것인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노스요크 시장 멜 라스트먼(Mel Lastman)은 점점 후자의 입장을 지지했고, 노스요크 시의회에서 영 스트리트 일대로 셰퍼드 애비뉴에서 핀치 애비뉴 사이의 재개발 및 고밀도화를 추진하였다.[32] 1970년대 후반까지는 노스요크에도 자체적인 도심이 생길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영 지하철은 양쪽 끝에만 역이 존재하였다.
1982년 9월, 멜 라스트먼 시장과 노스요크 시의회는 토론토 교통국에 파크홈 애비뉴에 지하철역을 신설해 달라고 요청하는 안건에 표결을 올렸다.[41] 이 사업은 당시 2,200만 달러로 추산되었다.[42] 라스트먼은 15억 달러 규모의 개발과 수천 개의 신규 일자리가 예상된다며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주장하였다.[42] TTC의 최고 총괄 관리자인 앨프 새비지(Alf Savage)는 "현재 새 역 주변에는 약 17,500개의 일자리가 있으며, 향후 15년 동안 최대 40,000개의 추가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새 역의 필요성은 분명하다"고 밝혔다.[42] 통합시 의장 폴 갓프리(Paul Godfrey)도 동의하며, 유일한 아쉬움은 노선 자체를 건설할 때 이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며 "그랬다면 비용은 백만 달러도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42]
노스요크와 통합시가 승인하면서 설계가 진행되고 자금이 확보되었으며, 온타리오 지방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남은 문제는 역명 결정이였다. 1984년 초까지만 해도 TTC는 이 역을 '파크홈역'이라고 부르고 있었다.[42] 하지만 파크홈은 주요 도로가 아니였고, 이 때문에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다른 이름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1984년 6월, 노스요크 공공도서관 이사회는 역명을 도서관의 이름을 따서 '라이브러리역'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42] 이 문제를 검토하면서 TTC는 스파다이나선과 스카버러 RT에 적용된 정책을 참고했다. 즉, 주요 교차로가 없거나 주요 목적지가 역 바로 인근에 있을 경우, '뮤지엄역'이나 '스카버러센터역'처럼 목적지를 나타내는 이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TTC는 파크홈역을 '노스요크센터'(North York Centre)역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공사는 1985년 9월에 시작되었다.[42]
이미 운영 중인 지하철 터널 주위에 새로운 역을 건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 스트리트를 굴착한 뒤 교통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부를 덮어 덱을 설치했다. 인부들은 지하철 터널 주위를 파내어 2층 구조의 역 틀을 세워야 했다.[42] 승강장의 콘크리트 바닥은 기존 터널 벽까지 부을 수밖에 없었고, 벽을 절단하기 전에는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터널 벽 절단 작업은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는 야간에만 가능했다. 이 작업이 완료된 후 나머지 승강장 부분이 마무리되었다. 두 선로 사이의 중앙 벽은 일부만 개방되었으며, 역 전체와 동일하게 흰색 바탕에 파란색 포인트 타일로 마감되었다. 역 공사 현장을 지나던 지하철 열차들은 공사 인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속도를 늦췄고, 승객들은 차창 너머로 짧은 시간 동안 공사 현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42]
노스요크센터역은 예정대로 1987년 7월 18일에 개통하였으며, 최종 비용은 2,500만 달러였다. 개통식은 오전 10시에 열렸고, 멜 라스트먼 노스요크 시장이 리본을 자르며 데니스 플린 통합시 의장, 에드 풀턴 온타리오주 교통부 장관과 함께 참석했다. 역은 그날 오후 2시에 공식 개통하였다.[42]
다운즈뷰(셰퍼드웨스트)역
[편집]지하철 확장 계획인 네트워크 2011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토론토 통합시의 지하철 건설 우선순위를 정립했다. 이 계획은 1994년까지 셰퍼드 지하철을 영에서 빅토리아파크까지 건설, 1998년까지 다운타운 릴리프선 건설, 이후 에글린턴 애비뉴 버스전용차로 건설, 이후 셰퍼드 지하철을 서쪽으로 스파다이나 지하철 연장선과 연결하고, 동쪽으로 스카버러 타운 센터까지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3] 1985년 통합시는 이 계획을 주정부에 제출했고, 새로 집권한 데이비드 피터슨 자유당 정부가 오랜 우왕좌왕 끝에 1988년 윌슨 애비뉴에서 셰퍼드까지 스파다이나 지하철을 한 정거장 연장하는 계획을 승인했다.[44]
당시 자유당 정부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네트워크 2011 계획에 선뜻 동의하기를 꺼려했다. 이미 운영 중인 지하철 노선을 단 한 정거장 연장하는 작은 선물을 통합시에 던져주는 것은 시간을 벌려는 의도로 보였다. 당시에는 또한 셰퍼드 지하철을 우선 건설해야 하는지, 아니면 스파다이나 지하철을 요크 대학교까지 연장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44] 마침 토론토가 1996년 하계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요크 대학교는 주요 경기장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며, 시 전역과 연결되는 신속한 교통망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컸다.[44]
스파다이나선 셰퍼드 연장은 두 계획이 공통으로 담고 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주정부가 이를 먼저 확정하고 착공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후의 우선순위 논의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고, 요크대학교 연장은 2007년에야 자금을 확보했으며, 셰퍼드선 서부 연장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한 정거장 연장은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가는 지하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44] 특히 스카버러 정치인들은 네트워크 2011 계획의 첫 단계로 예정된 셰퍼드 지하철이 지연될 것을 우려하며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가 당장 제안한 유일한 지하철 건설안이었기에, 통합시 의회는 결국 이 1억 6천만 달러짜리 사업을 지지하기로 하고, 1989년 4월 26일에 찬성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는 10년 넘게 처음 승인된 지하철 연장 사업이었다.[44]
이 연장은 예상보다 긴 환경영향평가 과정을 거쳤다. 이 사업은 다운즈뷰 공군기지와 인접해 있어 복잡해졌는데, 이 군 기지는 곧 폐쇄될 예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었다. 제안된 두 가지 노선안은 탄약 보관 및 처리 건물과 너무 가까워진다는 이유로 기지 측에서 거부되었다.[44] TTC는 원래 노선을 크게 곡선으로 돌려 셰퍼드역이 동서 방향으로 정렬해 훗날 셰퍼드 지하철과 바로 연결(또는 직결 운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남북 방향 정렬이 채택되었고, 두 노선은 직결보다는 환승을 전제로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노선은 군 기지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 사업은 1991년 9월 온타리오주 환경부의 승인을 받았다.[44]
착공식은 1992년 6월 22일에 열렸다. 터널 공사는 주로 개착식으로 진행되었고, 긴 구간은 노천 개착부로 건설되었다. 선로는 윌슨 차량기지 옆을 따라 윌슨역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약 4년 간의 공사를 거쳐, 노선은 1996년 3월 30일 승객들에게 개통되었다. 총 사업비는 1억 1,700만 달러였다.[44]
스파다이나선 연장 구상
[편집]1990년 9월, 피터슨 자유당 정부가 밥 레이(Bob Rae)가 이끄는 신민주당(NDP)에 패배하면서 신규 지하철 건설에 대한 주정부의 지원은 또다시 지연되었다.[45] 이후 4년이 지나서야 신민주당 정부가 '렛츠 무브(Let's Move)' 계획을 내놓았다. 이 계획에서 네트워크 2011 계획은 대폭 축소되어, 단축된 셰퍼드선과 에글린턴 웨스트선만 남게 되었다. 이 두 노선 외에도 레이 정부는 스카버러 RT를 동쪽과 북쪽으로 연장해 셰퍼드 애비뉴와 마컴 로드까지 연결하고, 스파다이나선을 요크 대학교까지 연장하며, 나아가 스틸즈 애비뉴를 따라 환상선을 구축하는 첫 단계로 삼는 방안을 제시했다.[46]
이 시점에는 요크 대학교 연장에 대한 지지가 커지고 있었다. 특히 본(Vaughan)은 스틸즈 웨스트역 건설 비용을 일부 부담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시는 스카버러 RT 연장과 요크 대학교 연장안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경기 침체에 따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 정부와 통합시는 에글린턴 웨스트선과 셰퍼드선을 우선 추진하고, 스카버러 RT와 요크 대학교 연장은 뒤로 미루기로 합의했다.[47]
하지만 1995년 6월 선거에서 신민주당 정부가 패하고 마이크 해리스(Mike Harris)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에글린턴 웨스트 지하철은 전면 취소되었고, 대중교통에 대한 운영 및 자본 보조금도 모두 폐지되었다.[47] 그 결과 요크 대학교 연장안은 사실상 장기간 휴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48]
해리스 정부가 대중교통에 대한 주 정부 지원을 없앴음에도 불구하고, 셰퍼드 지하철이 계속 건설되던 시기 토론토시는 다음 지하철 연장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 주 총선을 앞두고 멜 라스트먼 시장은 TTC 계획 담당자들에게, 만약 해리스 보수당이 토론토 유권자들에게 선심성 공약을 내놓는다면 어떤 사업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검토하라고 요청하였다.[48] 이 과정에서 셰퍼드 지하철을 돈밀스에서 빅토리아파크까지 연장하는 계획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에글린턴 웨스트 지하철이나 스카버러 RT 연장안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담당자들의 초점은 스파다이나선의 요크 대학교 연장에 맞춰졌다.[48]
1999년 무렵, 요크 대학교 연장에는 여러 유리한 조건들이 있었다. 다운즈뷰 군 기지의 재개발 계획과 토론토의 2008년 하계 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강력한 추진 동력이었다. 여기에는 2000년에는 본이 제인 / 7번 도로 교차로 주변에 새로운 도심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 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본은 스파다이나선을 요크대학교를 거쳐 스틸즈 북쪽의 해당 교차로까지 연장할 것을 제안했다.[49] 본은 스틸즈 애비뉴 북쪽의 모든 공사비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자치구 의원들을 상대로 전 구간의 주정부 자금 지원을 로비하겠다고 나섰다. 요크 대학교도 본의 제안을 지지했는데, 이는 단순히 공사를 시작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지하철이 요크 대학교에서 종착할 경우 요크 지역 주민들이 학교 부지 내에 주차하려 몰려드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48]
본의 제안이 나왔을 때, 한때는 영 지하철과 스파다이나선을 7번 도로를 따라 연결하는 방안도 고려되었으나 곧 폐기되었다. 이후 2005년경 요크 지역과 온타리오 주정부는 영 지하철을 랭스태프 애비뉴(Langstaff Avenue)까지 연장하는 계획을 제안했는데, 이 노선을 동서 또는 북쪽으로 더 잇는 구상은 포함되지 않았다. 2002년 이후로는 영과 스파다이나선 북쪽 끝을 연결하자는 진지한 제안은 나오지 않았다.[48]
본의 지지가 요크 대학교 연장안을 휴면 상태에서 끌어올려 토론토 계획 담당자들의 눈에 최우선 과제로 만들었다. 이후 맥귄티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고, 특히 맥귄티의 재무부 장관 그렉 소르바라(Greg Sorbara)가 해당 지역구에서 당선되면서 주정부 자금 지원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50] 결국 맥귄티 자유당은 토론토시가 이 사업에 대한 전면적인 환경영향평가와 공청회를 진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고, 이 과정은 2005년에 완료되었다.[51]
2005년 환경영향평가와 공청회에서는 스파다이나선 지하철 연장을 스틸즈 웨스트까지 이어지는 노선 정렬이 확정되었다.[51] 이후 2007년부터 2010년까지의 추가 연구는 노선을 본까지 연장하는 것과 각 역의 위치 및 설계가 최종 결정되었다.[48] 초기에는 CN의 뉴마켓선을 핀치 근처에서 건널지, 셰퍼드 근처에서 건널지를 두고 논의가 있었다. 또한 본이 '코퍼레이트 센터'(Corporate Centre) 개발 계획을 내놓기 전까지는 노선이 스틸즈에서 동북쪽으로 꺾여 영 스트리트 방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북서쪽으로 꺾여 제인 / 7번 도로 방향으로 이어질지를 두고도 논쟁이 있었다.[48]
환경영향평가가 확정되자, 주정부는 이 사업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였다. 2006년 3월 23일, 온타리오 주정부는 예산안에서 스파다이나 지하철을 스틸즈 애비뉴까지가 아니라 본에서 제안한 본 코퍼레이트 센터(이후 본 메트로폴리탄 센터로 개명)까지 연장하는 데 6억 7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52] 이 금액은 당시 예상된 총 건설비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요크 지역과 토론토시가 나머지 3분의 1을 분담하기로 했는데, 분담 비율은 토론토가 60%, 요크 지역이 40%였다.[48] 마지막 3분의 1은 연방 정부로부터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이 자금을 확보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세부 설계에 대한 추가 공청회 과정까지 겹치면서 실제 착공은 2010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공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다운즈뷰파크 북쪽에 첫 번째 굴착 구덩이를 파는 작업이 착수되었다. 이 시점에서 사업 명칭도 바뀌어, 공식적으로 토론토-요크 스파다이나 지하철 연장선(Toronto-York Spadina Subway Extension, TYSSE)으로 불리게 되었다.[48]
스파다이나선 연장 공사
[편집]연장선의 설계 단계는 2009년 말 무렵 마무리되었고, 본격적인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첫 단계는 노선을 따라 시추 작업을 실시해 토양 샘플을 채취하고, 굴착 시 건설 인부들이 마주하게 될 지질 조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노선 전반에 걸쳐 예상보다 지하수위가 높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는 전체 공사 비용을 크게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53]
다운즈뷰파크역 인근의 첫 수직구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터널굴착기는 2011년 1월 17일 현장이 도착하였다. 노선의 지상 교통 혼잡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요 공법으로 터널 보링이 채택되었다.[48] '홀리(Holey)', '몰리(Moley)', '요키(Yorkie)', '토키(Torkie)'라는 이름을 시민 공모로 붙인 네 대의 터널굴착기는 토론토 소재 기업 로바트(Lovat)가 제작하였으며, TTC가 5,800만 달러에 구입하였다.[54] 전체 연장선 8.6km 중 6.6km 구간을 이 터널굴착기로 굴착하고, 나머지는 개착식 공법으로 시공하기로 했다.[48]
2011년 6월 17일, 토론토 시장 롭 포드, 온타리오주 교통부 장관 캐슬린 윈, 요크 지역 의장 빌 피시, TTC 의장 캐런 스틴츠, 연방 환경부 장관 피터 켄트가 참석한 가운데 네 대의 터널굴착기 중 첫 번째 장비의 가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목표는 2015년 말 개통이었다.[55]
당시 다운즈뷰역에는 원래 역 북쪽에 주박선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여러 상가 건물을 수용 및 철거해야 했기 때문에 계획이 수정되었다. 대신 주박선을 역 남쪽으로 옮겨 윌슨에서 중간 종착을 가능하게 하려 했지만, 실제로는 건설되지 않았다. 그 대신 연장선의 일환으로 다운즈뷰역(오늘날의 셰퍼드 웨스트역)과 윌슨 차량기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터널과 선로가 건설되었다. 이 공사는 2010년 2월에 착공하였으며, 개착식과 도로 상부 덱 설치를 통해 앨런 로드(Allen Road) 아래로 터널을 뚫었다.[48] 새 터널은 다운즈뷰 교차로 남쪽에서 남행 선로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향하며, 윌슨 차량기지를 북쪽에서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 연결선으로 윌슨 차량기지에서 출고되는 열차들이 요크 대학교 및 본 지역까지 더 빠르게 운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48]
셰퍼드 웨스트 및 다운즈뷰파크역 현장에서 네 대의 터널 굴착기는 직경 5.4m의 땅굴을 파내며 각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굴진했다. 한 쌍은 다운즈뷰역을 향해 남쪽으로, 다른 한 쌍은 핀치 웨스트를 향해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작업이 끝난 뒤에는 장비를 회수하여 재배치했다. 한 쌍은 스틸즈 웨스트에 설치되어 남동쪽으로 핀치 웨스트 방향으로 굴진했고, 다른 한 쌍은 407번 고속도로 인근에서 북쪽과 남쪽을 향해 굴착하여 노선을 완성했다.[48]
2015년 초에 들어서서 스파다이나선 연장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예상치 못한 혹독한 겨울로 날씨 관련 지연이 있었고, 한 건설 노동자의 사망 사고로 노동부 조사가 진행되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에 따라 공식 개통일은 2016년으로 연기되었으며, 예산도 4억 달러 초과했다.[56] 여기에 일부 역 시공업체들이 마감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문제가 불거졌고, TTC가 시공업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5년 3월 20일 TTC는 추가적인 비용 및 지연 요인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접수했는데, 이는 개통이 2016년 이후로 더 늦춰질 것임을 의미했다. 결국 이 사업과 관련된 TTC 고위 임원 두 명이 사임했다.[56]
보고서는 네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방안은 현재의 조직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이 경우 비용은 1억 8,500만 달러, 개통은 2019년으로 늦춰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반대로 가장 저렴한 방안은 나머지 공사와 감독을 제3의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맡기는 것이었으며, 이 경우 비용은 1억 5천만 달러로 줄고, 2017년까지 완공할 수 있었다. 입찰 공고를 내고 경쟁을 붙이는 방안은 1억 8천만 달러가 들고 개통은 2018년으로 늦춰질 것으로 예상되었다.[57]
회의에서 TTC 위원들은 보고서를 승인하며 남은 공사와 감독을 단일 입찰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공식 개통일은 2017년 말로 연기되었지만, 이후 공정은 속도를 냈다. 2017년 3월까지 굴착과 선로 공사가 완료되었고, 디젤 기관차가 장비를 끌며 선로 간격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어 제3궤조 전력이 가동되었고, 2017년 4월 4일에는 첫 번째 토론토 로켓(Toronto Rocket) 열차가 다운즈뷰역을 출발해 다운즈뷰파크역으로 천천히 진입, 기념 촬영을 했다. 이 열차는 이후 본까지 이동하여 같은 날 오전에 종점에 도달했다.[48]
또한 TTC는 다운즈뷰역의 명칭을 셰퍼드 웨스트역으로 공식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2017년 5월 1일부터 시행하여, 연장선 개통 전까지 승객들이 새 이름에 익숙해지도록 전환 기간을 두었다. 이 무렵부터 역명판 교체 및 변경 작업이 시작되었다.[58] 마침내 2017년 9월 5일 TTC 이사회 회의에서, CEO 앤디 바이포드(Andy Byford)는 지하철 연장선이 2017년 12월 17일부터 본격 영업 운행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였다.[59] 이에 앞서 2017년 11월 26일부터는 연장 구간에서 승객을 태우지 않는 시운행이 시작되는데, 이는 열차가 정상 시간표대로 운행되지만, 북쪽으로 향하는 승객들은 셰퍼드 웨스트역에서 하차해야 하는 시험 운행 형태였다.[48]
스파다이나선 연장 개통
[편집]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본 메트로폴리탄 센터역에서 연장선 개통식이 열렸다.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 온타리오 주지사 캐슬린 윈, 토론토 시장 존 토리 등 주요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리본 커팅 후 귀빈들은 대기 중인 열차에 탑승해 요크대학교 역으로 이동해 연설을 이어갔다.[60] 그러나 행사장에는 시공업체 하청 노동자들이 참가하여, 시공사 및 TTC와의 임금 문제 분쟁을 두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61]
개통식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핀치 웨스트역에서 공개 행사가 열렸다. 이 역은 공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사전 일반 공개를 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이어 12월 17일 일요일 공식 영업 개시일에는 존 토리 시장과 TTC 위원장 마이크 콜이 셰퍼드 웨스트 역에서 출발하는 첫 북행 열차에 탑승해, 파이어니어빌리지역에서 온타리오주 교통부 장관 스티븐 델 두카와 합류한 뒤 종점 본 메트로폴리탄 센터까지 이동했다.[48]
또한 TTC는 주정부의 지원 덕분에 개통을 기념하여 12월 17일 일요일 하루 동안 전 노선 무료 운행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48]
참고 문헌 및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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