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신상정보
출생일 1373년 8월 2일(1373-08-02)
사망일 1448년 9월 23일(1448-09-23)(75세)
사망지 베젤의 카르투시오 수도원
가문 라 마르크가
부친 마르크 백작 아돌프 3세
모친 마르가레테 폰 윌리히
배우자 아그네스 폰 팔츠
마리 드 부르고뉴
자녀 바이에른 공작부인 마르가레테
헬데른 공작부인 카테리나
요한 1세 폰 마르크
슈바르츠부르크-블랑켄부르크 백작부인 엘리자베트
나바라 여왕 아그네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부인 헬렌
라펜슈타인 영주 아돌프
오를레앙 공작부인 마리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독일어: Adolf I, 1373년 8월 2일~1448년 9월 23일)는 14세기에 활동했던 라 마르크가의 제2대 클레베 백작이자 제4대 마르크 백작이다.

생애

[편집]

마르크 백작 아돌프 3세마르가레테 폰 윌리히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마르가레테 폰 클레베의 남매 관계에 해당된다. 1394년 아버지가 서거하면서 클레베 백작을 물려받았다. 1397년 클레버함 전투에서 삼촌 베르크 공작 빌헬름 7세를 물리치고 라벤스테인 영주가 되었다.

1398년 형제 마르크 백작 디트리히 9세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마르크 백작을 겸하게 되었다. 나아가 부르고뉴 공작의 딸과 결혼하여 영향력을 한층 더 확대했다. 그 결과 클레베는 1417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공국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1409년부터는 마르크 백작령의 양위를 주장하던 동생 게르하르트와 충돌했다. 1423년경에는 게르하르트가 쾰른 대주교와 동맹을 맺고 무력충돌을 벌이면서 양측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1430년 두 형제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1437년에 재확인되었다. 조약에 따라 게르하르트는 마르크의 대다수 봉토를 넘겨받았지만, 후계자는 조카인 요한 1세 폰 마르크로 지정되었다. 요한은 스스로를 이를 때 '마르크의 백작' (von Mark)이 아닌 '마르크 출신 백작' (zur Mark)라는 칭호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1461년 게르하르트가 사망한 후, 마르크 백작령과 클레베 공국은 재통합되었다.

라 마르크의 문장
클레베의 문장

결혼과 자녀

[편집]

1400년경 루프레흐트 폰 더 팔츠엘리자베트 폰 뉘른베르크의 딸인 아그네스(Agnes)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1년 후에 사망했다.

1406년 아돌프는 장 1세 드 부르고뉴 공작마르가레테 폰 바이에른의 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했다.[1]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각주

[편집]
  1. Boulton 2000, 577쪽.

Sources

[편집]
  • Boulton, D'Arcy Jonathan Dacre (2000). 《The Knights of the Crown: The Monarchical Orders of Knighthood in Later》. The Boyell Press.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출생: 1373년 8월 2일 1448년 9월 23일
이전
마르크 백작 디트리히 9세
마르크 백작
1398년–1448년(1430년)
이후
마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이전
클레베 백작 아돌프 3세
클레베 백작
1394년–1417년
공국으로 승격
신설 클레베 공작
1417년–1448년
이후
요한 1세 폰 마르크